2013년 4월 26일 금요일

터키 이야기



7. 소아시아와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

 
 
 
(2) 서머나 (SMYRNA) - 신약성경과 서머나
 
서머나는 성경에서 2번 언급되어 있으며(계1:11; 2:8-11), 서머나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더불어 책망 없이 칭찬만 받은 교회이다(계2:8-11). 서머나 교회의 칭찬의 내용은 그리스도를 위한 환란과 궁핍과 훼방을 견디어낸 것이었다. 서머나 교회에 주신 권고의 말씀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 것과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다. 폴리갑은 사도요한의 제자로서 약 60년 동안 서머나 교회의 감독을 지냈으며, 156년 화형으로 순교하였다.
  (1) 복음전파의 경로
서머나에 복음이 들어온 경로는 분명치 않으나, 첫째는 에베소에서 3년간 복음을 전했던 사도바울의 영향과 둘째는 바울의 순교 후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던 사도요한이 서머나와 버가모에도 복음을 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에베소와 서머나의 거리는 약 80Km 정도이고, 사도요한의 수제자였던 폴리갑이 오랫동안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있었던 점들을 감안할 때 이러한 추측이 가능하다.
 
  (2) 계시록의 서머나 교회 (계2:8-11)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아노니”
‘서머나’라는 이름은 “쓰다”라는 뜻으로 끊임없는 환란과 박해, 자연재해로 인한 빈곤들로 인해서 이러한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특별히 서머나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하였다. 폴리갑 순교기에 의하면 폴리갑은 빌라델비아에서 잡혀온 11명의 신자들과 함께 순교자로 화형 당했으며, 그 밖에도 많은 환란과 박해가 있었다. 주님께서 주신 말씀은 이러한 서머나 교회의 배경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여겨진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서머나에는 제우스 신전, 퀴벨레 여신전, 등등 우상숭배가 성행하였고 로마시대에는 황제숭배가 성행하게 되었다. 그러자 우상숭배를 거절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은 박해를 받게 되었고, 특히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의 앞잡이 역할을 하였다. 폴리갑이 12번째의 순교자로 화형 당할 때에도 서머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율법 중 안식일을 범하는 죄를 지으면서까지 폴리갑을 산채로 화형 시키라고 주장했다. 폴리갑을 화형 시키기 위해 나무를 주워와 장작더미를 준비하는 등 실로 ‘사단의 회’처럼 기독교를 박해하는데 선두자 역할을 했다.
 
  (3) 속사도 시대의 서머나
◎ 이그나티우스의 서신들 ◎
서머나는 계시록의 기록에는 몇 절만 기록되어 있지만 계시록 이후 속사도 교부들의 시대에는 수신자로서 그리고 발신자로서 여러 편지들이 남아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사도요한과 거의 동일한 시대에 살았고, 안디옥 감독으로 로마로 이송되어 트라얀 황제 때(AD 98-117) 순교했던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로마로 이송 도중 드로아(Troas)에서 서머나 교회와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에게 보낸 서신이 전해지고 있다. 그의 순교가 학자들이 추정하는 대로 AD 110년경 이루어졌다면 이 서신들은 아마 AD 110년 이전에 기록되어 보내졌을 것이다.
◎ 폴리갑의 빌립보서 ◎
빌립보서에서 보낸 서신에 답신으로 기록된 이 서신서는 이그나티우스의 순교와 관련되어 그의 신변에 대한 질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그나티우스의 순교 직전이나 직후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기록 연대는 AD 110년경으로 여겨진다.
그의 편지에서 폴리갑은 이단에게는 냉정하고 단호하였다. 당시 로마에서 활약한 말시온(Marsion)을 가리켜 “사단의 맏아들”이라고 잘라 말하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적그리스도이다. 그리고 십자가의 증거를 고백하지 않는 자는 악마이다. 자기 욕심에 따라 주의 말씀을 왜곡시키고 부활과 심판의 사실을 부인하는 자는 사단의 장자이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그나티우스와 폴리갑 서신서들은 사도들로부터 예수님에 대해 직접적으로 배운 속사도 교부들이 점증하는 교회의 내적(영지주의적 이단들), 외적(황제의 탄압) 위험들이 맞서서 기독교의 진리를 어떻게 옹호하고 가르쳤는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계속>

한국 홀사모 난생처음 밴쿠버 나들이 (1)



 
 
 
 
 
 

 

최원심 목사(전남 광주) 간증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땅에 새 생명들을 피워내는 따스한 봄에 한 여인의 이름 없는 들풀 같은 인생 이야기를 해 보려합니다. 저는 전남 나주의 가난한 가정에서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몸 반쪽을 못 쓰시는 장애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가난과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나이가 훨씬 많은 집에 후처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난 저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아픔을 많이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더 좋은 환경을 찾아 시집을 갔을지 몰라도, 제가 자라는 과정은 날마다 가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신앙이 없는 집안에서 17살 소녀가 공장에 다니며 받은 월급은 혼자 사는 엄마와 두 동생을 거두는 생활비로 사용 되었습니다. 소녀 가장의 짐을 지고 살아가면서 말할 수 없는 외로움과 슬픔과 고통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이때 신앙의 눈이 열리게 되고, 기도를 통하여 이겨내는 훈련을 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제 신앙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좋은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골 동네 사람들은 “그렇게 고생하며 살던 원심이가 좋은데 시집을 갔다”고  위로와 격려를 했습니다. 마음씨 좋은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젊은 우리부부는 믿음을 키워가며, 사역에 꿈을 키우며, 부지런히 준비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누리는 행복이었습니다. 사역자가 되겠다던 남편은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로 어린 두 아들을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거기다가 교통사고 보상금으로 받은 그 당시 우리 세 모자의 생명줄 같았던 사천만원은  갑자기 당한 슬픔의 시간 속에 그만 사기를 당하게 되고, 어린 두 아들과 저는 세상에 버려진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어린 시절을 숱한 가난과 시련을 견디며 살아 왔었지만,  그 당시의 제 처지는 앞이 캄캄하고 도무지 정신을 차리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그토록 사역을 꿈꾸던 그 마음을 이어받아 주님께 매어 달리며 신학을 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1인 3역을 감당하며 살았습니다. 아파도 아플 시간이 없을 정도로 두 아이의 엄마로, 야간에는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주일은 교회 전도사로,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일에 감사하며 이겨나가던 어느 날, 작은 아들이 다른 아이들 같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생각에 병원에 데려 갔더니 “자폐아”라는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그때의 “자폐 장애” 판정은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 젊은 전도사의 마음과 믿음을 사정없이 깨부수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현실. 아이가 4살이 넘어가면서 그 증세가 더 뚜렷하게 나타나고 그런 아이를 데리고 사역을 한다는 자체가 너무나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전도사 과정을 다 마치고도 전임 사역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풀타임 사역자가 되어야 교회에서 사택을 제공받아 어린 두 아들을 따뜻하게 잠을 재울 수 있는데, 우리 처지를 받아주는 사역지는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파트타임도 수없이 많은 눈치를 받으며, 살얼음판을 걸어가는 심정으로 어렵게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날은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것도 눈치가 보이고 집에 혼자 두자니 더 큰 사고가 염려되어 마침내는 내가 나를  미워하는 그런 날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전도사가 그래서는 안 되는데 하나님이 너무나 멀리 계신 것 같았습니다. 내가 속한 어느 곳에서도 도무지 사랑을 찾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주님이 부르신 사명을 붙잡고 이를 악물고 여러 교회를 다녔습니다. 아이들 말대로 짤릴 때까지 다니니 남들이 보기에는 왜 저렇게 살까? 하겠지만 제 나름대로는 그것이 내가 붙잡은 작은 사역이며 목회였습니다.
 
목회가 아픈 목회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른 평범한 전도사님들 보다 내게는 약점이 많았기에 교회의 온갖 허드렛일은 다 감당을 하였고 장애자 아들을 끼고 살아가는 제 생활은 누구의 사랑과 긍휼을 얻기 이전에 제 자신이 날마다 더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을 데리고 저녁부터 교회 성전에 엎드렸습니다. 잠이든 아들을 눕혀 놓고 “하나님 우리 모녀를 오늘 천국으로 데려 가 주십시오.”하면서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사실 우는 것이 아니라 통곡을 하였습니다. 새벽 기도를 인도하시려고 연세드신 담임 목사님이 처절하게 울며 기도하는 저를 보시고 가까이 오시더니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주님 여기 이 전도사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하며 간절히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목사님의 기도가 응답이 되었다면 저희 모자는 지금 천국에 가 있어야 합니다.
 
어려운 중에서도 전라도 여러 지역의 교회에 길을 열어 주셔서 주님이 허락한 장소에서 몸을 던지면서 감당케 하셨습니다. 지금은 전남 광주 변두리에 어떤 젊은 남자 목사님이 목회하셨던 비어 있는 개척 교회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간이 지나 큰 아들이 군대를 제대하고 학교를 복학하여 장애를 가진 동생을 시간이 허락 되는 대로 도와주니 큰 힘이 됩니다. 그 아들 역시 어린 시절을 동생에 치이며 자라서 볼 때마다 미안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잘 자라줘서 큰 위로가 됩니다.
 
이번에 캐나다 초청을 신청하면서 남들 같이 저는 내세울 사역도 열매도 없습니다. 다만 부끄러운 지난 일들을 안고 있는 저에게  꿈에도 엄두 못 낼 캐나다와 미국 여행을 하는 위로의 시간이 주어진다니, 저를 참여 시킨 것은 아마 숭실교회에서 많이 울면서 살아왔다는 말 그대로 위로하시려고 저를 선택 해 준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말이 사역자이지 언제나 맨 뒤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설교를 잘해서 어느 교회서 불러주지도 않고 큰 사역을 간증하라고 해도 내 놓을 것이 없습니다. 그저 많이 울어서 영산강 물에 내 눈물이 보태 진 것 같은 그런 지난 시간을 가진 저에게 비행기를 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막상 가려고 하니 또 작은 아들이 밟히고 걱정이 되어 망설이게 됩니다. 그러는 저에게 큰 아들이 꼭 갔다 오라고 등을 떠밀었습니다. 분명히 아들이 떠미는데 꼭 예수님이 시키신 것 같았습니다.
 
세상이 만만하지 않다고 어른들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길이 그렇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습니다. 다시 캐나다 여행을 하면서 주님께 새 힘을 달라고 기도 할 것이며, 돌아와서도 하나님께서 저에게 맡긴 나머지 사역을 붙잡으려 합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 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필객의 붓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시간에도 인플레가 있는지 시간의 분량이나 가치에 대한 감이 이전 같지 않습니다. 몇 일 뒤의 소퐁 날이 도저히 오지 않을 것처럼 더디게만 흘러가는 시간에 애를 태우던 어릴적 시간에 대한 감이, 일 년의 행사가 몇 일 사이의 일처럼 짧게 느껴지고 늘 벌써?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요즘과 전혀 다른 길이의 시간으로 느껴집니다. 한 주를 시작할 때는 부자가 된 기분으로 주말의 사역들을 잘 준비하리라 맘을 먹지만, 몇 일을 건너뛰고 성큼 다가선 것 같은 시간에 당황하며 미진한 채로 주말을 맞이하곤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세월이 간다고 하는데 지금의 속도도 버거워하는 내가 점점 둔하고 느려지는 걸음으로 재빠르게 달아나는 세월의 보폭을 따라 잡을 수 있을까 긴장이 되곤 합니다.
 
봄 햇살 속에 하늘과 구름과 꽃과 잔디가 발산하는 색감이 너무나 생생하고 아름다워 도저히 집에 있을 수 없어 하려던 일을 멈추고 밖으로 나섰습니다. 시계가 없는 자연의 공간에서 심호흡을 하며 걸으니 심장을 분주하게 길들이던 초침소리도 멎고 불안감이 가십니다. 시간의 감시에서 벗어나 잠깐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것만 같습니다. 새벽 기도 가기 전 보스톤 테러 소식이 궁금해 인터넷에 들어갔는데 이란의 지진 속보가 올라와 있어 오늘 아침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세계의 나라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 아래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으로 울부짖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지금 이 공원을 걷는 사람들 중에도 마음으로 절망을 앓거나 울고 있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마음이 쓰입니다. 미국의 언론은 또 다시 테러와의 전쟁에 서슬퍼렇게 날을 세우고, 총기 소지에 관한 제재를 가하겠다고 하는 등 계엄이 불가피한 분위기로 몰아가며, 키프러스의 뱅크런이 세계경제에 나비효과를 불러올 것에 대한 불길한 기대감을 조성하고 있는 등의 열강의 고래싸움에서 한국도 북한의 도발이나 WCC의 유치, 또 부동산이나 실물경제의 악화를 놓고 정치, 종교, 경제적으로 등이 터지는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기름받은자를 대적하며 그 맨것을 끊고 결박을 벗어버리자” 고 했던 시편 2편의 세상 같습니다. 학교 다닐 때 그토록 외울 것이 많고 지루하고 복잡하던 역사는 단순한 패턴으로 반복적으로 흘러가는 것이었습니다. 말세의 징조가 그 어느때보다도 뚜렷한 지금, 치열한 영적 전쟁의 때에, 계시록에서 온 천하를 꾀는 자, 마귀, 사탄의 존재가 참 큰 비중으로 등장하고 있고, 음악이나 영화나 패션에서 조차 마귀의 존재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정작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에서는 마귀와 사단의 존재가 사라지고 고상하고 지적인 언어로 긍정과 축복이나 인간 개혁에 관한 메시지들로 채워지고 있음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옳고 그름이 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취향대로  두리뭉실하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포스트 모던의 세상은 정말 심각한 혼돈이며 짙은 어둠입니다. 테러를 당해 놀라고 고통을 당한 사람들에 대한 기사 옆에 음란과 물질을 선전하는 광고들이 도배가 되어있는 모습을 보면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는, 인간의 정을 잃어버린 세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어려운 전문 용어를 나열하며 무슨 말인지 모르게 복잡하게 쓴 기사들이나 자신이 말하려는 바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빗겨서 쓴 기사들이나 저급한 문장력의 기사나 댓글을 보면서 책을 읽고 쓰는 시간보다는 주로 그림과 영상을 접하며 살아가는 대중들의 난독증이 심해지고 있음을 확연하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뭔가에 목소리를 내다가도 결정하고 반응하는 면에서 일관성 없이 이랬다 저랬다하는 사람들을 보면 혹시 이해하지도 못한 사실들을 이해한 듯 착각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딱한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되어질 세상이 성경 안에 밝히 드러나 있는데도 언론이 휘젓는대로 이리저리 쏠리며 우왕좌왕하는 대중들의 모습을 보면 백주에 담을 더듬듯한다는 신명기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마지막 때의 징조가 너무나 뚜렷하고 크고 두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모세의 때보다 더 아름다운 때를 살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 제사와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을 구하던 구약의 때가 지나고 신약의 세상을 여는 마태복음 1장에서 벌써 하나님의 임재의 약속이 펼져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다 해결하고 난 후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내주하시는 성전이 되는 놀라운 은혜가 임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는 하나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등불이 항상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비춰줄 것이라 하신 약속대로, 성경을 열면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임마누엘의 은총으로 함께 하시고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영혼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너무나 영광스럽게도 이 누추한 인생에 거룩하신 아버지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나의 생애가 마치는 날까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어 이 세상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며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길 간구하는 기도를 쉬지 않겠습니다. 
 
[서수영 사모 / penofgod@gmail.com]
 
 
 
 
 
 

아브라함 이야기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 / 창 22:11-19 (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이유- 온전한 헌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이든지 제한을 두지 않고 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셨습니다. 12절에 중반절에 보면,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라고 나와 있고 16절에도,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이라고 나와 있는데 여기서 ‘아끼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샤크타’ (hΩaœsíak≈taœ)인데 그 뜻은 ‘제한하다, 금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이삭을 하나님을 위해서 제한하거나 금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온전한 헌신을 보시고자 시험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제한없는 헌신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이유- 온전한 예배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지를 알고 싶어하셨습니다.12절에 보면,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셨습니다. 앞에서 ‘경외’라는 것은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기 때문에 즉, 존재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경외하는 것’과 ‘예배하는 것’은 아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예배의 핵심은 ‘거룩’과 ‘경외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경외함으로 무릎 꿇는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온전한 예배 드림을 보길 원하셨고, 아브라함이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이유- 온전한 순종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준행하는지를 알고 싶어 하셨습니다. 18절에 보면,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준행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샤마아타’ (sûaœma{taœ)인데 그 뜻은 ‘듣다’입니다. 단지 ‘듣다’라는 말이 ‘준행하다’라는 말로 번역된 것은 ‘준행하는 것’이 ‘듣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귀담아 ‘듣고,’ 마음 속 깊이 ‘새겨 들어야’ 비로소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뼈 속 깊이 새겨 들었는지를 알고 싶어하셨고, 아브라함은 한 말씀도 놓치지 않고 듣고 마음에 새겼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이유- 온전한 축복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해서 온전히 헌신하고, 예배하고, 순종하기를 원하셨던 것은 아브라함을 향한 계획을 갖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 계획은 이미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알려주셨던 계획인데 본문에 다시 나오고 있습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17-18절). 여기서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는 말씀은 ‘그 원수들의 도시들을 정복한다’는 의미인데 비슷한 표현이 창 24:60에 나옵니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 이것은 이전에 주어진 약속보다 더 참신하고 실제적인 하나님 약속으로서 약속의 성취가 더욱 가까왔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거대한 믿음의 족속을 형성케 하시고 그 믿음의 족속들을 통하여 천하만민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축복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그릇이 되는가를 알기 원하셨고, 아브라함은 순종함으로 온전한 축복의 성취를 앞당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애독자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 여호와 이레의 신앙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인들이 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특히 온전한 헌신과 예배와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앞당겨지는 역사가 일어나길 축원합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4인4색 밴쿠버목양일기


 
 
 
 
 
 
 
 
 
 
 

지금이 축복의 씨앗에서 싹이 날 기회 입니다

요즘 밴쿠버의 이슈 중 하나는 40대 주 총선거에 나서는 BC자유당의 선거 공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들의 이번 선거의 공약을 압축하면 “빚 없는 BC주”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슬로건을 희망으로 여기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이러한 공약을 실천시키려고 국민들이 내야 하는 세금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냐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저는 이런 시점에서 한가지 생각을 해 봅니다. 왜 사람들은 매번 선거 때가 되면 많은 기대감을 가졌다가 곧 실망하는 일들을 반복할까?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선거가 이슈가 되는 이유들 중에 중요한 한가지는 사람들이 희망에 굶주려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특히, 요즘 같은 경제 불황에서 밴쿠버에 사는 이민자들은 더욱 절박한 마음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얻고 싶어합니다. 현재 우리의 삶이 너무 곤고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밴쿠버로 이주하면서 좋은 꿈을 가슴에 품고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를 하면서 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민의 정착에서부터 순탄하지 않은 현실에 부딪히게 됩니다. 많은 경우 시간이 흘러도 이민의 삶이 전보다 나아지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처음보다 더욱 힘든 삶을 사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과거에 다 비우고 왔던 조국이 생각나기도 하고, 조금의 미련도 두지 않고 잊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과거의 삶에 후회와 미련이 밀려옵니다.
요즘 성도들을 상담할 때 적지 않은 분들이 제게 묻는 것이 “목사님 제가 잘 가고 있는 것인지요?”라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가슴이 저려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저에게 있어서 그 분들이 결코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라, 삶이 힘들고 곤고해서 내는 신음소리 같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한가지를 상기해 본다면 조그마한 위로가 되리라 생각을 합니다. 주님은 공생애가 시작이 되자 마자 첫 번째 하신 경험이 광야 생활이었습니다.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시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다윗… 우리가 성경 속에서 친숙하게 만나는 인물들 대부분에게 광야 생활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이들의 공통점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예배, 믿음만으로 광야의 인생을 견디었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의미의 복된 삶이 그들의 인생에서 움트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축복의 씨앗이 있습니다. 적당한 환경이 주어질 때까지 그 씨앗은 딱딱한 껍질 속에 오랫동안 싸여져 있습니다. 모든 씨앗은 적당한 온도와 수분이 주어지면 싹을 틔우고 공기와 햇볕으로 광합성을 하면서 성장하고 꽃을 피웁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서 각 사람에게 심어주신 하나님의 축복의 씨앗에 언제 싹이 날까요? 유수한 성경의 인물들에게서 보여진 것처럼, 광야의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견디어 내는 그때에, 그리고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예배의 자리를 찾아 주님께 엎드리는 그때에 씨앗이 발아되기 시작을 합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시간이 없다면 절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축복의 싹을 우리 스스로 트게 할 수 없습니다.
현재의 상황이 모두가 어쩔 수 없는 경제 불황이다 생각하고 단순히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기 보다, 주님이 우리 안에 있는 축복의 씨앗을 발아시키기 위해서 주신 환경이구나 생각을 하시고 오히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는 기회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지금이 축복의 씨앗에 싹이 날 기회입니다. 진정한 희망은 주님에게서 시작이 됩니다.
 
[라일주 목사 / 로고스교회 / 778-898-1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