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6일 일요일

이단은 날뛰는데‘전문가’가 없다



신학자ㆍ목회자ㆍ상담자ㆍ법률가 등의 이단전문위원회 구축 필요




이단ㆍ사이비 단체들의 공격적인 포교활동으로 목회자 및 성도들의 피해가 속출하고 있는 가운데 교계 단체 및 교단들이 적극적인 대처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CBS의 경우 신천지 고발 웹사이트인 ‘한국 교회를 살리자-신천지 OUT’(http://antiscj.cbs.co.kr)이라는 사이트를 오픈하고 이단상담소, 신천지대책 전국연합을 비롯해 각 교단 이단대책위원회 등과 연대해 이단 척결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신천지 아웃’ 사이트는 신천지의 이단성과 교회 침투방법 및 파괴, 성도를 유인하는 방법 등에 대해 고발하는 내용을 비롯해 신천지의 포교활동에 대처하는 방안 등을 소개하고 있으며, 교회의 각종 피해사례 소개 및 피해 접수, 상담 지원 등의 코너도 함께 마련해놓고 있다.

예장합동, 통합, 백석, 고신, 대신 등 장로교 주요 교단들도 ‘이단경계주일’을 정하는 등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으며 교단 산하 각 교회들에게 이단ㆍ사이비 단체들의 포교활동에 대한 안내문과 경고 포스터를 제작, 배포하는 등 신앙공동체 안에 교묘하게 침투하는 이단ㆍ사이비의 공격에 강력하게 대응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와 같이 교계 단체 및 교단들이 이단ㆍ사이비 단체의 포교활동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이유는 교회의 피해사례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출과 이혼, 학업 및 직장 포기, 비도덕적 가정생활, 경제적 손실 등 성도는 개인의 행복을 잃어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목회자 및 성도들에 대한 음해, 교회 중직자들 간 불화 조장, 루머를 퍼뜨려 교회에 내분을 일으키는 등 교회적 차원의 피해도 극심한 상황이다.

이에 대해 대다수 이단전문가들은 이단ㆍ사이비 단체에 의해 피해가 발생할 경우 치료 및 회복이 매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예방적 차원의 대처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목회자들에게는 평소 정통신학의 교리가 무엇인지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이단들의 잘못된 교리를 분석하는 등 이단ㆍ사이비의 공격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하지만 이단전문가들은 이단들과 만났을 경우 감정적 대응을 자제하고 교리 논쟁이나 설득하려는 시도를 삼갈 것을 권고한다. 또한 절대 당황하거나 서두르지 말고 정확한 정보와 사실에 입각해 대처하는 등 추측이나 추론을 절대 삼가고 공신력 있는 이단연구소의 지침에 따라 행동할 것을 당부한다.

특히 일반 성도들의 경우 신학적, 성경적인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단ㆍ사이비의 속임수에 쉽게 넘어갈 수 있다. 따라서 이단에 현혹됐거나 현혹될 위기에 처한 성도들을 발견했을 경우에는 목회자나 주변 성도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보다 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협회(www.jesus114.net) 등과 같은 전문적인 기관을 통해 신앙상담(이단상담)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반 목회자와 성도들의 경우 이단ㆍ사이비 단체들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단전문가들은 교회 담임목사는 정기적인 세미나를 개최해 이단ㆍ사이비 단체들의 다양한 정보를 습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당부한다. 또한 평소 건강한 구원론, 기독론, 성령론 등의 설교를 통해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교리를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와 같은 이단대처를 위한 연구에 있어서 공신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도 필요하다. 탁지일 교수(부산장신대)는 “이단과의 투쟁을 통해 교회의 신학과 신앙이 정립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정통수호’라는 명분하에 ‘정적 제거’의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다”며 “오늘날 공신력 있는 이단대처는 기독교 공동체를 순결하게 지켜내지만 무분별한 이단정죄는 선의의 피해자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탁 교수는 “모든 교단들은 관련 학자, 신학자 등의 전문 인력자원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사회가 공감할 수 있는 이단연구를 진행해야 한다”며 “이단연구는 교단을 넘어 타교단과 기관, 사회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공감대를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가장 필요한 것은 다양한 지원이다. 탁 교수는 “이단 피해자들에 대한 한국 교회의 배려와 지원은 상대적으로 미약한 편”이라며 “신학자, 목회자, 상담자, 의료전문가, 법률가, 피해자 가족 등으로 구성된 상설 전문위원회가 전국 각 지역단위로 구축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단피해 지원을 위한 조직적인 지원프로그램 운영 없이는 이단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은 제한적인 임시방편일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를 위해 각 교단들이 ‘이단상담소’를 개설하거나, 이미 개설돼 있는 상담소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예장 합동총회 산하 이단(사이비)피해대책조사연구위원회(위원장:박호근 목사)는 지난 16일 ‘제1회 총회 이단ㆍ사이비 대책 전략 세미나’를 개최하고 이단ㆍ사이비 상담소 운영의 방향성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날 이대위 서기 유웅상 목사는 “총회가 이대위를 상설해 이단대책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도록 하고, 이단상담소를 설치 운영하고 있지만 매우 어려운 상황임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유 목사는 “상담원의 부족과 운영에 따른 경제적인 어려움, 이단들의 고소고발에 따른 법적인 대응을 위한 지원 등이 어려운 상황”이라며 “무엇보다 이대위의 적극적인 지원과 총회 산하 모든 교회들의 관심이 절실하게 필요한 실정”이라고 강조했다.

이단에 미혹됐거나 앞으로 미혹되는 한국 교회의 피해를 줄이고 회심하도록 대처하기 위한 이단상담소의 역할과 사명은 큰데 반해 효과적으로 운영되기에는 많은 과제들을 안고 있다는 지적이다. 유 목사는 “이단들의 미혹이 극심한 시대에 몇몇 이단상담소만으로 미혹된 성도들을 상담하는 것은 역부족”이라며 “한국 교회 전체가 이단의 미혹에 대한 대처 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특히 이단상담사의 양성, 이단상담학의 학문화, 법무팀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총회 이단상담소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법률 자문 기구를 만들 것 △총회 본부에 이단 상담소를 개설할 것 △이단 상담훈련 △이단 연구과목 개설 △합리적인 재정정책 등의 방향성을 제시한 박호근 목사는 “총회는 이단 상담소를 보호하며 지도해 역할을 성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상담소 역시 총회에 긴밀히 협력해 총회의 이단 대책사역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단상담소장 김종한 목사(벌교대광교회)는 “이단 세미나 개최, 이단에 빠진 성도들의 정보 수집, 이단들의 불법에 대한 법적 대응, 이단에 대한 주제별 집중교육 등 이단ㆍ사이비에 대한 교회의 피해대책방안은 다양하다”고 설명했다. 김 목사는 “한국 교회가 이단ㆍ사이비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면 쉽게 포교하지 못할 것”이라며 “각 교단은 목회자들이 이단들에 대해 연구하도록 지도하고, 지역 노회별로 평신도를 훈련하는 센터를 만들어 특정 이단의 교리를 주제별로 가르쳐 이단과 맞설 수 있는 적극적인 방법을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단피해대책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다시 회복시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로 만드는 것”이라며 “한국 교회는 이단전문가를 양성하는 기관을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예수님의 마음 치유


 

제 11 장 영의 치유와 혼의 치유


1. 육이 주관하는 삶

..... 하나님의 뜻대로 나라를 다스리는 훈련을 받지 못한 경호 장관은 독재자가 되어서 힘으로 모든 것을 다스린다. 군사 독재 정권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혼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순간 영이 다시 살아난다 (Born again: 거듭남) 왕이 식물인간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왕비는 깨어난 왕을 보고는 엄청 기뻐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전의 자리로 돌아가고자 애를 쓴다. 그러나 그것이 뜻대로 되질 않는다. 다시 깨어난 왕의 힘이 아직 너무 약하다. 또한 지난 수 십 년동안 자신의 삶과 주위 온 세상이 “새 남편”에게 길들여졌고 거기에 순응하는 삶이 되었기 때문이다. 혼(왕비)은 갈등한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다 한다. 남편이 두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고, 새 남편으로부터 자식들을 많이 낳았기 떄문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는 고백이 흘러나온다.

(로마서 7장 22-24)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이” 이 상황에서 살아간다. 사도 바울같은 신앙에 들어가면 모를까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리 고명한 목회자라 할지라도 우리들과 별 차이가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존경받으며 세상을 떠난 주의 종들도 뒷 이야기가 많은 것을 우리가 자주 경험한다. 세월이 가면서 무너져 내리는 육신을 버티어내기에는 우리의 영과 혼의 힘이 너무 약하기 때문이다.

2. 혼은 무엇엔가 의지해야만 한다 - 영 아니면 육체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능력을 강조한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면 인간의 문제 정도는, 나아가서 혼의 연약함 정도는 바로 해결된다고 선포하면서 목소리를 높인다. 자기들을 통해서 능력을 받으면 만사가 해결된다고 말한다. 정말 그런가? 우리 모두가 잘 안다. 성령의 충만함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혼(왕비)이 겪고 있는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가 없는 문제다. 결혼을 두 번해서 양쪽에 자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문제가 어찌 쉽게 결말이 나겠는가? 양쪽 모두 내 자식들이다. 비록 자신이 왕비라는 것을 이제 확실하게 알았더라도 말이다.

진실된 아가페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끝없는 이해심을 가지고 혼이 (왕비가) 하나씩 하나씩 결단을 해 나가도록 도와야 한다. 서서히 원래의 자리로 올라오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이 내적 치유인 것이고 성화의 과정인 것이다. 성화가 성령의 충만으로 즉시 이루어 질 수 있을까? 만일 그렇게 믿고 또 기대한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위험한 길에 서게 될 것이다. 아주 쉽게 이단 종파의 먹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화는, 즉 내적 치유는 ‘영’ (깨어난 왕)의 문제라기보다 두 번 결혼한 왕비 (혼)를 통해서 일어난 복잡한 상황과 문제들을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담의 모습으로 회복하는 작업이고 과정인 것이다. 성령의 불같은 충만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 (갈라디아서 5: 22-24) 를 맺는 나무로 그 “뿌리”를 변화시키는 작업인 것이다. 한때는 남편으로 의지하던 경호 장관 (육체)를 온전하게 제 자리로 돌려놓는 데까지 가야만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7:17-18)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결코 쉽지 않은 일이고 과정이다. 이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그동안 남편 (왕) 없이 왕비가 살아온 험한 세월을 겪으며 받은 수많은 마음의 아픔과 상처들을 치료해야 한다. 그리고 삶과 마음과 생각과 습관의 모든 것을 원상으로 회복해야만 하는 것이고 나아가서 과거의 모든 기억까지 치유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내 돈인가? 하나님 돈인가?



내 돈인가? 하나님 돈인가? - 랜디 알콘



경제학 개론 첫 시간에 들은 ‘인간활동의 대부분은 경제활동이다’ 라는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돈 만큼 가깝고도 먼(?), 그러면서도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주제가 없어 보입니다. 쉽지도 않고 자유 하지도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돈과 함께 살아가는데 잘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돈과 소유돈에 대한 올바른 사고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 얼마이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를 통해 볼 수 판별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에게 맡겨진 것에 충성되지 않으면 주인 되신 하나님이 더 많이 맡기시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현재의 삶에서 돈에 대한 태도는 철저히 청지기적 사명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청지기의 최고의 목표는 주인에게 충성하고 인정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라며 당연히 우리의 모든 소유도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주인과 반드시 회계할 날이 있음을 기억하고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돈에 대한 잘못된 관점들돈은 나쁜가? 그렇지 않습니다. 돈은 가치 중립적입니다. 성경은 돈 자체가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합니다 (딤전6:10). 돈은 사용하는 사람의 가치 기준에 따라 다르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돈을 사용하지만 종이 되어 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물질 만능주의 즉 배금사상은 가짜 하나님,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탐욕은 성적인 부도덕과 우상숭배와 같은 종류의 심각한 죄악입니다 (골3:5). 인생은 결코 소유에 따라 측정되지 않습니다.
물질만능주의의 치명적인 위험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의 영적인 삶을 방해하거나 파괴시킨다.
2) 물을 담을 수 없는 깨어진 그릇이다.
3) 부의 저주로 우리를 눈멀게 한다.
4) 불행과 염려를 가져다 준다.
5) 종착역은 궁극적으로 공허함이다.
6) 인생의 많은 축복들을 깨닫지 못하게 만든다.
7) 믿음에 치명적인 독립성을 낳는다.
8) 교만과 엘리트의식을 갖게 만든다.
9) 부정과 착취를 증진시킨다.
10) 부도덕성과 가정의 황폐함을 가속시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물질 만능주의와 부단히 싸워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성경적인 경제관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이 버려지고, 깨어지며, 소용없게 되었을 때, 우리의 소유를 가지고 영원까지 지속될 일을 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유함을 주신 것은 그것을 붙잡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관대하게 나누라고 맡기신 것입니다.

영원성의 관점에서 본 청지기직
예수께서는 우리의 보물과 마음을 하나님 나라에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6:19-24) 이 땅에서 재물을 하나님 나라를 위한 목적에 드림으로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삶이기 때문입니다. 장례식 행렬에 이삿짐 트럭이 따라가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고 나눔으로 먼저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십니다. 충성스러운 청지기에게 주시는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주님 앞에서 자신들의 삶에 대한 결산을 하게 될 것인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 재능, 돈, 소유와 같은 자원들로 행한 일을 영원의 관점에서 측정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돈과 소유를 드리고 나눔십일조는 우리의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기억하는 훈련의 도구 입니다. 또한 기쁨과 감사를 담아 자발적으로 드리는 헌금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또한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을 돕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꼭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돈과 소유물을 지혜롭게 다루기
진정한 제자도는 전략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선택하도록 인도합니다.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을 온전히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빚을 지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빚은 우리를 속박하여 사람의 종이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잠22:7). 최대한 빨리 빚으로부터 자유로워 지시기 바랍니다. 빚을 지는 상황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 묻고, 자신의 씀씀이나 경제적 제한에 대한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미래를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현재뿐 아니라 미래의 관점에서 비용을 측정하고 저축해야 합니다. 유산을 상속할 때도 자녀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어야 하고, 때로 지나치게 많은 부를 상속함으로 자녀들에게 중독, 게으름, 부도덕을 조장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청지기직의 전수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돈과 소유를 어떻게 관리하는지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들이 물질에 몰두하여 경건한 삶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정말 중요하고 더 필요한 유산은 지혜와 관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돈뿐 아니라 우리에게 돌보라고 맡기신 자녀들의 청지기이기도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청지기직의 모범을 보이고, 공동체로서도 돈에 대한 올바른 가치를 실현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건강한 재정적인 모델이 세워져야 합니다.

돈을 벌고 사용하지만 결코 돈에 지배당하지 않는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소유가 영원하지 않음을 기억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꺼이 나누고 드리는 헌신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돈과 소유로 영원한 가치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778-868-3063 / Ezekiel475k@gmail.com]


 

재미있는 여호수아서 (24)



위대한 결단



AD 79년 8월 24일 오후 1시, 전대미문의 자연재해가 한 지역을 강타했다. 24시간 동안 폼페이시와 5,000명 이상의 시민들이 갑자기 지상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폼페이 최후의 날”은 이 사건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다. 도시의 뒷산에서 화산이 터져 용암이 흘러 도시를 덮어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앞 다투어 도시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때 한 여인이 수많은 인파 가운데 도시를 잘 빠져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발길을 돌렸다. 금고 속에 있던 자신의 보물이 생각 난 것이다. 뛰고 또 뛰어, 자신의 집에 도착했다. 황급히 금고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보물을 자신의 품에 안았다. 그때 갑자기 그녀의 머리위로 집의 벽이 무너져 즉사하고 말았다. 잘못된 결단의 최후를 실감나게 하는 영화였다.

신앙은 “결단(Decision)”하는 것이다. 중립지대가 없다. ‘신앙인’이란 자신이 택한 진리를 위해 죽기를 각오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바닷가에 가면 갑각류(게)가 있다. 게는 항상 겟벌 속에 들어가 두 개의 구멍을 뚫고 자신의 몸을 숨긴다. 적의 침입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들만의 전략이다. 그러므로 게를 잡으려면 한 쪽 구멍을 막고, 다른 쪽 구멍을 파들어 가야 게를 잡을 수 있다. 신앙생활도 바다 게처럼 할 수 있다. ‘진리’를 향한 구멍 하나와 ‘세상’을 향한 구멍 하나를 뚫어 놓고, 그 사이를 매일 넘나들며 사는 것이다. 이런 자들을 향해 성경은 강하게 도전한다.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3:16)고 경고한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다(수24:1,29).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위대한 결단’을 촉구한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여호수아는 오랜 기간 동안 하나님을 경험했다. 절대 부인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것이다(수24:1-13). 그래서 여호수아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결단하라”고 외쳤다. 여호수아의 외침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스(Yes)”로 화답했다(수24:21). 여호수아는 입으로만 하는 약속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율법 책에 그들의 약속을 기록 했다(수24:25). 이것도 불안했다. 다시 돌을 가져다 성소 곁에 세웠다.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증표로 돌을 세운 것이다(수24:27). 여호수아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백성을 향한 사랑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명장면이다.

성공한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강인한 결단력’을 소유한 자들이 많다. 세계적인 기업 ‘코카콜라’는 위대한 결단력이 만든 기업이다. ‘아사 캔들러’는 코카콜라의 창업주다. 그는 원래 알코올 중독자였다. 의지력도 약했다. 주위 사람에게 몇 번이나 금주선언도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어느 날 술에 취해 길을 걷던 중 마음의 음성이 들려왔다. “자신의 본능적 요구를 거절하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소리였다. 이 이야기를 자신의 아내에게 들려주었다. 아내는 바로 그 시간 남편의 ‘금주’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순간 캔들러는 ‘금주’를 결단했다. 엄청난 인내의 과정 속에 영혼의 안식이 그의 영혼에 찾아 들었다. 그리고 알콜중독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결단이란 말은 이것을 택하기 위해서 저것은 버려야 하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결단은 “이방신들을 치워 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수24:23)는 말씀에, 나의 전 인생을 걸겠다고 결단하는 것이다.

황보창완 목사 (밴쿠버성산교회 청년부) / 778-708-5540

“재미있는 여호수아서”는 이번 회로 마칩니다. 9월 7일자부터는 계속해서 “사도행전” 시리즈가 이어집니다. 많은 애독 바랍니다. 【편집자】



 

터키 이야기 (10)



 

6. 신약 성경과 터키


1) 수리아 안디옥
바울의 선교기지였던 수리아 안디옥 교회는 최초로 크리스천이란 칭호를 들은 교회이다. 사도 베드로는 여기서 얼마동안 살면서 안디옥 교회의 초대감독으로 일했고 사도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을 선교센터로 삼았다. 바울은 그의 4번에 걸친 전도여행 중 3번을 안디옥에서 출발했다.

안디옥은 셀레우코스 1세(BC 321-281)에 의해 세워졌으며 그의 부왕의 이름을 따서 ‘ANTIOCH’라 불리었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BC 83년에 멸망당하여 로마의 속주 시리아의 수도가 되었다. 로마의 지배 하에서 안디옥은 번영을 누리게 되며 당시 로마,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세계 3대 도시로 부상된다. 그러나 AD 6세기에 이 도시는 2번의 재난을 당하게 되는데, 그 하나는 대지진으로(AD 523년) 약 20만 명의 사망자를 내게 되었고, 또 하나는 페르시아군의 침략으로 도시가 깡그리 불타버렸다.

유적으로는 사도 베드로의 암굴교회와 로마시대의 수로, 성벽,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를 모아놓은 박물관 등이 있다. 특별히 베드로 동굴교회의 모습은 당시 박해 아래서 신앙을 고수하던 수리아 안디옥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사도베드로는 선교여행 중(AD 29-40년) 안디옥 교회를 방문하게 되며,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이 동굴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12세기-13세기에 들어 교회는 십자군들에 의해 동굴입구에 고딕 스타일의 교회 정면이 건립되었다. 지금의 동굴교회 안에는 바닥 모자이크를 볼 수 있으며, 오른쪽 귀퉁이에는 우물이 있고, 왼쪽에는 크리스천들이 사용했던 비밀 통로가 있다. 이 좁고 긴 터널은 외부의 침략이 있을 때 교회 안에 있던 크리스천들이 산 너머 다른 곳으로 피신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베드로 동굴교회>

2) 실루기아 (행13:4)바울의 첫 번째 전도여행은 안디옥을 출발하여 현재 사만다(Samandağ)로 불리는 실루기아로 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구브로(키프러스) 섬으로 갔다.

3) 다소 (TARSUS - 행8:1-2; 11:25; 22:3)
길리기아 지방의 다소는 사도바울의 출생지로서 학문과 상업의 중심지였다. 다소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로마시대에 다소는 문화도시로서 많은 석학들을 배출한 도시였으며 따라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길리기아 다소 사람이라는 큰 자부심이 있었다. 바울은 유대인의 혈통이면서 로마시민으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기원전 67년 타르수스와 실리시아의 나머지 지역이 로마의 첫 번째 실리기아 주지사였던 키케로에 의해 통치되었고 줄리어스 시저가 47년에 이 도시를 방문하기도 한 영광스러운 도시였다. 기원전 41년 타르수스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로마의 안토니우스가 로맨스를 만든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타르수스는 중요한 기독교 센터가 되었으나 아랍족의 약탈과 통치자들이 수없이 바뀌면서 쇠퇴되었다. 1515년, 오스만 터키의 수중에 들어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적으로는 사도바울의 우물, 클레오파트라의 문, 타르수스 박물관 등이 남아있으며, 마을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외부는 봉쇄된 아치와 4개의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고, 실내의 둥근 중심부에 예수님을 비롯해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모습이 프레스코로 장식되어 있다. 북서쪽의 끝에는 예쁜 종탑이 있다.


<바울 우물>

4) 갑바도기아 (Cappadocia)아나톨리아의 중앙 동쪽 지역을 갑바도기아라고 불렀으며, 서쪽으로는 갈라디아(앙카라)와 루가오니아(코냐)로, 동쪽으로는 아르메니아, 북쪽으로는 본도, 남쪽으로는 길리기아에 둘러싸여 있다. 이 지역은 타우로스 산맥의 북쪽 고원지대로서 오랜 옛날 이 지방의 가장 높은 에르지에스산(3,914m)의 화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시간이 지나면서 비바람의 풍화작용 등으로 깎여나가 이런 특이한 모양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네로 황제의 박해를 피해 약 250년 동안 이곳으로 은둔하였다. 그들은 이곳의 자연을 이용하여 지하도시를 건설하고 기도처, 동굴교회, 주택, 학교 등을 만들어 생활하였으며 그 후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뒤 교회가 타락해가자 초대교회의 신앙을 따르던 수도사들이 이곳에 와서 수도원을 건설, 경건한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이슬람의 침략으로 또 다시 기독교인들은 이곳을 찾았고 비잔틴 시대에는 성화파 신앙인들의 은둔처가 되기도 했다. <계속>

<갑바도기아의 지하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