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9일 일요일

정성헌선교사의 선교칼럼



내 부모는 나를 버렸지만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니 (1편)

 
 
그리스도의 복음은 능력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증거되는 곳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복음이 인간을 어떻게 수렁에서 건져 내고, 깨어진 인생을 고치는지 ‘슈라’를 소개한다. 
선교지에서 초창기 과부 몇 명이 주축이 된 교회를 개척할 때이다. 그들 중의 리더였던 안나 할머니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고려인 과부 할머니가 있었다. 그의 이름이 ‘알렉산드라’, 러시아식 애명이 ‘슈라’였다. 찬송을 부를 때면 눈을 지긋이 감고, 성경을 교독할 때면 다른 사람의 음성을 듣고만 있던 그녀, 특이하게도 몇 번 들은 찬송은 거의 다 외워서 부르시는 분이었다.
개척사역이 한창이던 어느 날 밤, 슈라는 과일을 사 들고 교회사택으로 나를 찾아왔다. 마주 앉은 슈라는 잔득 뜸을 들이더니 나에게 한글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했다. 내가 “왜 갑자기 한글을 배우려고 하시냐?” 라고 묻자 “목사님이 지난 주 설교 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려면 반드시 성경을 읽고, 알아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그랬죠. 러시아어 성경이 있는데 굳이 한글을 배워 성경을 읽으실 이유가 있나요?”  이 말에 조금 긴 침묵이 흘렀다. “목사님, 저는 러시아어를 읽을 줄 몰라요.” 순간 나는 멍해져 눈을 깜박거리며 무슨 뜻인지를 몰라 슈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목사님, 실은 저는 글을 읽지 못해요! 저는 학교에 다닌 적 적이 없어요. 그냥 급해서 조금 붙여 읽고, 제 이름만 쓸 줄 알아요”
 이게 무슨 일인가! 우리 교회 할머니들은 구 쏘련 시절 의무교육으로 다 고졸이고, 대부분 초급대학이상을 나온 분들인데. ‘슈라’가 무학에다 문맹이라니. 내가 전해 듣기로는 공산당은 산꼭대기에 양치는 목동도 잡아다가 학교를 보냈다는데…… 무슨 사연이 있어 평생 글을 모르고 살았단 말인가? 아련히 덕유산 중턱에서 무교회 촌 개척사역을 할 때 섬기던  할머니들 생각이 났다.
 “아니 그 동안 글을 모르고 어떻게 생활하셨어요?”라는 질문을 하려는데 슈라는 자신의 인생의 보따리를 먼저 풀어 놓았다.
슈라가 자신에 대해 가진 희미한 첫 기억은 1937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중앙아시아로 이주하기 직전 자신은 노름꾼이었던 아버지에 의해 5살이 채 안된 나이에 노름 빚으로 팔렸다는 사실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 버림을 받아 한 많은 인생살이가 시작되었다. 두 번째 기억은 자신을 데려갔던 사람들과 열차를 타고 와 중앙아시아에 카작스탄 ‘우스토프’역에 내릴 때인데, 아마도 친 언니가 아닌가 생각하는 한 여자아이가 멀어지는 기차에서 자신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던 일이다. 그후 자신의 이름을 더 이상 부르는 이가 없어 이름을 잊어버렸고, 박씨라는 성도 데려간 집의 성과 그들이 지어준 이름 “꽃님이’가 나중에 러시아 이름으로 알렉산드라가 되었다고 한다.
 슈라는 자신의 이마 위와 머리에 있는 커다란 흉터를 보여 주었다. 이주되어 우스토프에 정착하던 중에 학교가 생겨 몰래 동네아이들을 따라 하루를 갔다 왔다. 그 사실을 안 주인이 “우리가 너를 공부시키려고 데려온 운 줄 아느냐?” 라며 어린 애를 등에 업히고 띠를 매어 주었다는 것이다. 너무 학교에 가고 싶어 몰래 도망쳐 학교에 몇 번 갔는데 화가 난 주인의 갈고리로 머리와 얼굴을 때려 그 때 생긴 흉터라며 앞머리를 올려 보여 주었다.

“목사님, 그 날부터 제 등에선 지린내가 시집가는 날까지 떠나지 않았습니다. 주인 집 아이를 다 키웠고, 큰 아들 장가가서 난 아이들도 다 키우고 나니 18살이 되었습니다. 도망치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분노와 좌절 속에 반항할 때면 주인집 남자들은 잔인하게 막 다루었습니다.” 슈라는 자신의 치마를 걷어 올려 인두로 지져진 상처를 내보였다. 나와 아내는 말문이 막혀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부모 복이 없으니 남편 복도 없는 것 같아요. 제가 19살에 시집을 갔는데, 그 남편 역시 평생 놀음과 바람기로 편할 날이 없었어요. 아들 하나, 딸 넷을 낳았는데 이제 딸 둘만 남았습니다.”
그녀의 가슴앓이는 절절이 이어졌다. 둘째 딸을 데리고 고분질을 갔는데 밭에서 만나 눈이 맞은 청년이 변심하자 그 딸은 강물에 투신하여 죽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도 장가들어 어린 딸 둘을 낳고 살다가 취중에 오토바이를 타다가 화물차에 치여 즉사했다는 것이다. 세 째 딸은 초등학교 때 같은 반 사내 놈이 가방에다 장난 삼아 뱀을 넣었는데 수업 중 가방에서 손을 넣고 학용품을 뒤지는데 뱀이 소매를 타고 등뒤로 올라가 붙는 바람에 심한 경기로 그 날부터 간질이 생겼다고 한다. 시집을 가서 딸 하나를 낳았으나 간질이 심해져 버림을 받고, 시름시름 앓다가 몇 달 전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지금 그 딸이 낳은 외손녀와 함께 생활한다고 했다.
이어지는 그 다음 말이 우리를 더 놀라게 했다. 분에 못 이겨 자신의 딸을 그 지경으로 만든 철없는 사내놈의 집에 찾아가 몇 번이나 갖은 욕과 저주를 다 퍼부었다고 한다. “우리 딸 죽는 날 네 놈도 죽는다!”라고.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막내 딸이 나이가 들면서 그 사내 놈과 눈이 맞았고, 죽기로 반대했지만 끝내 살림을 차려 사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저주 때문인지 그 사위도 평생을 마약으로 살다가 폐결핵까지 겹쳐 오늘 내일 하는 형편이라며 막내 딸 나타샤가 시골로 다니면서 장사를 해서 겨우 가정이 연명하고 했다.
우리 부부는 듣다가 가슴에 멍이 들고 말았다. 결국에 어떻게 사느냐고 물었다. 그래도 큰 딸이 작은 포목전과 옷 가게를 해서 도움이 되고 있다고 했다.
이야기의 끝이 나갈 때 슈라는 다시 간곡하게 내게 한글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목사님, 죽기 전에 꼭 조선말로 하나님 말씀을 다 읽고 가고 싶습니다.”
“60중반인 이 할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쳐야 한단 말인가?” 순간 나는 목사의 양심으로 갈등하며 번민하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무리 생각해도 책임 질 수 없는 일이었다. 난감했다. 그런데 갑자기 묘안이 떠 올랐다. 안나 할머니에게 부탁을 하면 해결 될 문제였다. 안나 할머니는 평생 러시어어 선생님을 하시다가 교장으로 은퇴하신 분이시고, 중앙아시아로 이주하기 전에 5살에 이미 독립군이던 부모님으로부터 한글을 배웠던 분이다. 내가 안나 할머니에게 부탁을 할 테니 좀 기다리라며 겸연쩍은 표정으로 긴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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