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6. 구원은 인간이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명백한 진실에 직면하기를 꺼리는 현대인들은 구원받아야된다는 사실에 무지할 뿐 아니라 알아도 무능하다는 것은
우리가 ‘죄(罪) 아래’ 갇혀있다는 증거다. 인간은 누구나 구원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구원은 인간이 이루어낼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의 것이
전혀 아니다. 인간의 고안품목인 모든 종교적 부류의 잡동사니는 어떠한 형태로든 자력구원을 추구해왔으며 자기들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도달하고자 하는
종교에 묶여있는 인간의 참혹한 상태를 보여준다.
유대인들의 신앙은 종교적 노력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종교적이 되기 위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철저히 대적하였다. 율법은 이스라엘의 가식을 벗기기 위해 주어졌는데도 완고한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신들의 구원의 수단으로 삼아 다시 자신들을 노예의 상태로 머물기를 고집, 그들을 옭아매고 있었다(갈4:24,25 / 2:4).
유대인들의 신앙은 종교적 노력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종교적이 되기 위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철저히 대적하였다. 율법은 이스라엘의 가식을 벗기기 위해 주어졌는데도 완고한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신들의 구원의 수단으로 삼아 다시 자신들을 노예의 상태로 머물기를 고집, 그들을 옭아매고 있었다(갈4:24,25 / 2:4).
0097.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는 재난
기독교회내에서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는 것은 가장 무서운 타락이며 아직도 구원의 담 바깥에서 방황하고 있는 타락한 본성을 그대로 소유하고 있는 인간들의 가장 일반적인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노예의 땅 애굽(죄)에서 불러냄을 받았으나 이스라엘의 마음에서는 애굽이 나오지를 않았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성별되어(롬1:1) 그리스도의 복음의 신적기원(롬15:16)을 깨닫게 되고, “그 아들의 복음”(롬1:9)에 몰두 “내 복음”(롬2:16)으로 구가하게 전까지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과대평가로 가장하여, 빌립보서3장의 완전수 7가지 자랑 중 하나인 “율법의 의(義)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3:5)로 자아를 내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힘써 대적해왔던 자였다. 율법에는 성공한 것 같았으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철저히 실패한 자였다.
0098. 기독교는 그리스도 시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지성과 우리의 머리에 가득 차 있는 신학적 지식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에 의존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떠나서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누릴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자연인의 모든 선한 의지 조차도 자신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악(惡)으로서의 죄가 되어 조금도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여러 종교들 중에 하나도 아니다. 인간의 의지와 노력을 동원한 유쾌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인간적 가능성의 것이 전혀 아님을 알기 전까지는 인간은 교회안에서도 여전히 공허하고 무의미한 종교적 활동이란 죄에 몰두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의 죄로 알게 된 선(善)과 악(惡)인지라 악도 악이지만 인간들이 내세우는 선(善)도 하나님 앞에서는 악하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여전히 ‘죄(罪) 아래’ 갇혀있게 된다.
기독교회내에서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는 것은 가장 무서운 타락이며 아직도 구원의 담 바깥에서 방황하고 있는 타락한 본성을 그대로 소유하고 있는 인간들의 가장 일반적인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노예의 땅 애굽(죄)에서 불러냄을 받았으나 이스라엘의 마음에서는 애굽이 나오지를 않았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성별되어(롬1:1) 그리스도의 복음의 신적기원(롬15:16)을 깨닫게 되고, “그 아들의 복음”(롬1:9)에 몰두 “내 복음”(롬2:16)으로 구가하게 전까지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과대평가로 가장하여, 빌립보서3장의 완전수 7가지 자랑 중 하나인 “율법의 의(義)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3:5)로 자아를 내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힘써 대적해왔던 자였다. 율법에는 성공한 것 같았으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철저히 실패한 자였다.
0098. 기독교는 그리스도 시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지성과 우리의 머리에 가득 차 있는 신학적 지식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에 의존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떠나서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누릴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자연인의 모든 선한 의지 조차도 자신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악(惡)으로서의 죄가 되어 조금도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여러 종교들 중에 하나도 아니다. 인간의 의지와 노력을 동원한 유쾌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인간적 가능성의 것이 전혀 아님을 알기 전까지는 인간은 교회안에서도 여전히 공허하고 무의미한 종교적 활동이란 죄에 몰두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의 죄로 알게 된 선(善)과 악(惡)인지라 악도 악이지만 인간들이 내세우는 선(善)도 하나님 앞에서는 악하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여전히 ‘죄(罪) 아래’ 갇혀있게 된다.
0099. 예수-‘하나님은 구원하신다’
구원의 근원은 ‘아버지 하나님’이시다(독자는 ‘아버지 하나님’에 특별히 유의하시기 바란다). 신(新, Neo-)복음주의는 ‘아버지’(구약)신앙을 잃어버렸다. 은사주의자들은 아버지와 아들까지도 잊어버리고 ‘성령운동’이니 ‘지금은 성령시대’니 하는 무지몽매한 구호들을 들고나섰다. 지식을 무시한 채로 자신의 그릇된 열정만 의지하는 무익함을 동원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에 심한 해악을 뿌려왔다.
기독신앙 구원의 근본은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명심하기를 바란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의지해야한다. 인간이 자신의 공적을 내세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과 타협될 수 있는 진리가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우리는 구원을 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는 진리를 배우기 전까지는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구원의 의미를 다 안다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적인 공적과 자랑이 철저하게 거부되고 배제되는 ‘아버지 하나님의 의’(義)의 깊이와 심오함의 사랑 앞에 떨어보기 전까지는 “아 하나님의 은혜로…”(찬410)라는 찬송과 그 ‘가혹한 자비’의 은혜와, 삼위일체의‘아들’을 거부함으로써 유대인들이 받아온 고난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구원의 근원은 ‘아버지 하나님’이시다(독자는 ‘아버지 하나님’에 특별히 유의하시기 바란다). 신(新, Neo-)복음주의는 ‘아버지’(구약)신앙을 잃어버렸다. 은사주의자들은 아버지와 아들까지도 잊어버리고 ‘성령운동’이니 ‘지금은 성령시대’니 하는 무지몽매한 구호들을 들고나섰다. 지식을 무시한 채로 자신의 그릇된 열정만 의지하는 무익함을 동원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에 심한 해악을 뿌려왔다.
기독신앙 구원의 근본은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명심하기를 바란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의지해야한다. 인간이 자신의 공적을 내세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과 타협될 수 있는 진리가 전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우리는 구원을 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는 진리를 배우기 전까지는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구원의 의미를 다 안다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적인 공적과 자랑이 철저하게 거부되고 배제되는 ‘아버지 하나님의 의’(義)의 깊이와 심오함의 사랑 앞에 떨어보기 전까지는 “아 하나님의 은혜로…”(찬410)라는 찬송과 그 ‘가혹한 자비’의 은혜와, 삼위일체의‘아들’을 거부함으로써 유대인들이 받아온 고난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0100. 삼위일체 -“하나의 위(位)는 언제까지나 3위(三位)이며, 3위는 언제까지나 하나이다.”
구원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하나님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 성경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부피는 아버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who)’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4복음서는 아들 하나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무엇(what)’을 다 이루셨는지를 들려준다. 사도행전은 성령 하나님께서 ‘어떻게(how)’ 오늘 이 시간까지 역사하고 계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확정시켜주고 있으심을 들려준다. 이제 로마서에서 요한 계시록까지는 ‘누구, 무엇을, 어떻게’의 성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역사하고
계심을 들려준다. 바울서신은 특히 “시작, 중간, 끝”이 모두가 성삼위 하나님이 함께 일치되심을 알려주고 있다. 분리될 수 없는 성삼위 하나님의
신앙이 ‘신복음주의’, ‘오순절은사운동’을 통해 분리되고 나누어졌다. 이단들이 진리를 비(非)진리로 만드는 과정은 이미 균형이 완전하게 잡혀있는
교리에서 진리를 분리시켜 조각내어 나눔으로써 시작된다. 그리하여 균형을 잃고 한 쪽으로 기울어져 치우쳐진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대항하며 오염,
왜곡시킨다. ‘오직 예수’(신복음주의), ‘3박자 구원’(성령운동?) 등의 아버지 하나님이 사라진 치우친 신앙으로 인해, 한 때
‘동방예의지국’으로 알려졌던 한국은 ‘율법’(구약신앙)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값싸게 취급함으로써 “아버지가 없는 나라”, 즉 호주제가
무너진 나라로 둔갑하여 세계제일의『뉴에이지』(New Age) 첨단국가가 되었다. 영어의 ‘가정’(family)이란 단어는
‘아버지’(father)로부터 유래된 단어이다. 구약이 신약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이 구약을 제어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구약 없이는 신약의
온전한 이해가 불가할 뿐 아니라 구약이 없는 신앙은 모래 위에 지은 집으로 기초가 없이 곧 무너질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도올’인가
‘도살’인가하는 어떤 불신자가 ‘구약폐기처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는데, 한국교회의 어른이라는 분이 그 분의 무지한 박식함을 추켜주며 같이
찍은 사진을 보았다. 교계 지도자들의 영적 매춘행위가 극(極)에 달하는 현상으로 밖에는 보여지지 않는 슬픈 현실이다.
0101. 무화과나무(율법, 自己義) 아래에서의 ‘출애굽’
무화과의 때가 아닌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전혀 불합리하게까지 들린다(막11:12-25).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막11:9)를 들으시고 갈보리로 가시기 전이다. 무화과는 이스라엘의 상징이다(렘8:13/24:1-10/호9:10/미4:4/7:1). 예수님이 시장하셨는가? 이 단어는 ‘눈먼’ 예루살렘 성에 대한 예수님의 간절한 바램과 열망의 배고픔-“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이었다(눅13:6-9 / 19:41-44 참조).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었던『나다나엘』은 유대교의 가르침에 충실한, 간사가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었다(요1:47). 창세기3장의 무화과 나무로 만든 옷을 치우신 아버지 하나님, 아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의 출애굽을 위해 불러내셨다. 예수께서는 그 전에 성전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둘러보셨다”(막10:32). 잎만 무성하고 속은 비어있는 유대교의 교만, 허상, 화려함을 먼저 찬찬히 들여다 보셨다. 성숙없는 신복음주의의 ‘교회성장’을 이미 보신 것이었다.
무화과의 때가 아닌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전혀 불합리하게까지 들린다(막11:12-25).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막11:9)를 들으시고 갈보리로 가시기 전이다. 무화과는 이스라엘의 상징이다(렘8:13/24:1-10/호9:10/미4:4/7:1). 예수님이 시장하셨는가? 이 단어는 ‘눈먼’ 예루살렘 성에 대한 예수님의 간절한 바램과 열망의 배고픔-“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이었다(눅13:6-9 / 19:41-44 참조).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었던『나다나엘』은 유대교의 가르침에 충실한, 간사가 없는 이스라엘 사람이었다(요1:47). 창세기3장의 무화과 나무로 만든 옷을 치우신 아버지 하나님, 아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의 출애굽을 위해 불러내셨다. 예수께서는 그 전에 성전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둘러보셨다”(막10:32). 잎만 무성하고 속은 비어있는 유대교의 교만, 허상, 화려함을 먼저 찬찬히 들여다 보셨다. 성숙없는 신복음주의의 ‘교회성장’을 이미 보신 것이었다.
0102. “나는 포도나무요”의 포도원(은혜, 하나님의 義)땅으로 다시 심겨진
이스라엘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막11:13)는 말씀의 “때”는 시간적인 의미나 절기가 아니다. 영적 기갈을 보시고 유대교의 본산『예루살렘』의 성전에 들어가 모든 것을 둘러보신 때는 “이미 날이 저문 때”였다. AD 70년 예루살렘 성 함락으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훼파하신 때는 “…그 무화과 나무가 뿌리째 말라버린…”후 40년이 채 못되어 일어났다. 이스라엘의 중심인『예루살렘』성의 유대교의 뿌리인 성전을 뒤엎으신 이야기다. 무화과 나무 이야기를 전반부(막11:12-14), 후반부(막11:20-25)로 나누면 예수님의 준엄한 꾸짖음은 그 중앙(막11:15-19)에 들어있다. 이스라엘패망의 근본 원인은 로마가 아니라 “강도의 소굴”로 불릴 정도로 유대교의 성전의 부패되어 있었던 유대교의 성전신앙에 있었다. 율법중심의 유대교 신앙은 한계의 끝에 도달해있었다. 율법의 자기의로 은혜의 하나님의 의(義)를 대적함으로써 그들의 성전중심 신앙이란 실제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는 예배신앙이었다. 하나님 사랑보다 자신의 노력과 열정을 믿음으로써 철저하게 실패의 길로 들어섰다. 스스로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너무나 커진 나머지 하나님께서 거저주시고자 하신 영원한 생명이라는 구원의 선물을 거절하게 만들었다. 자아(自我)의지라는 가공할 악(惡)의 세력에 압도당하였다. 그리고……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기를 요구하면서……자신만만하게도 “…그의 피(His, KJV)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27:25)라고 고함치고 있었다. 유대교의 실패는 ‘삼위일체’신앙이 뿌리를 내릴 수 없을 정도이심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뿌리까지 저주를 내리셨고, 이스라엘은 그 무화과의 땅 이스라엘에서 뽑힘을 당한 후 2,000여 년을 유리하였던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이스라엘의 영광’은 아직 이르지 않았다 / 북미에서 자라는 자녀들을 위해 가정과 각 교회는 지금 Indigo-Chapters 등의 서점에서 특별 판매 중인 책-The Holocaust Chronicle-A History in Words and Pictures, 768pp, 2009 Legacy Publishing, $19.99-의 구입을 권한다. 4,000매가 넘는 역사적인 사진들을 담고 있다 / www.holocaustchronicle.org).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막11:13)는 말씀의 “때”는 시간적인 의미나 절기가 아니다. 영적 기갈을 보시고 유대교의 본산『예루살렘』의 성전에 들어가 모든 것을 둘러보신 때는 “이미 날이 저문 때”였다. AD 70년 예루살렘 성 함락으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훼파하신 때는 “…그 무화과 나무가 뿌리째 말라버린…”후 40년이 채 못되어 일어났다. 이스라엘의 중심인『예루살렘』성의 유대교의 뿌리인 성전을 뒤엎으신 이야기다. 무화과 나무 이야기를 전반부(막11:12-14), 후반부(막11:20-25)로 나누면 예수님의 준엄한 꾸짖음은 그 중앙(막11:15-19)에 들어있다. 이스라엘패망의 근본 원인은 로마가 아니라 “강도의 소굴”로 불릴 정도로 유대교의 성전의 부패되어 있었던 유대교의 성전신앙에 있었다. 율법중심의 유대교 신앙은 한계의 끝에 도달해있었다. 율법의 자기의로 은혜의 하나님의 의(義)를 대적함으로써 그들의 성전중심 신앙이란 실제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는 예배신앙이었다. 하나님 사랑보다 자신의 노력과 열정을 믿음으로써 철저하게 실패의 길로 들어섰다. 스스로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너무나 커진 나머지 하나님께서 거저주시고자 하신 영원한 생명이라는 구원의 선물을 거절하게 만들었다. 자아(自我)의지라는 가공할 악(惡)의 세력에 압도당하였다. 그리고……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기를 요구하면서……자신만만하게도 “…그의 피(His, KJV)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27:25)라고 고함치고 있었다. 유대교의 실패는 ‘삼위일체’신앙이 뿌리를 내릴 수 없을 정도이심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뿌리까지 저주를 내리셨고, 이스라엘은 그 무화과의 땅 이스라엘에서 뽑힘을 당한 후 2,000여 년을 유리하였던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이스라엘의 영광’은 아직 이르지 않았다 / 북미에서 자라는 자녀들을 위해 가정과 각 교회는 지금 Indigo-Chapters 등의 서점에서 특별 판매 중인 책-The Holocaust Chronicle-A History in Words and Pictures, 768pp, 2009 Legacy Publishing, $19.99-의 구입을 권한다. 4,000매가 넘는 역사적인 사진들을 담고 있다 / www.holocaustchronicle.org).
0103.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라
20세기의 중동에 이스라엘이 다시 건국되리라는 가능성은 성경학자들까지도 실현불가능한 꿈으로 보았다. 『시온주의자』들은 새 이스라엘의 건국을 두고 영국의 제의를 깊이 숙고하고 있었다. 즉, 남아프리카의 포르투갈의 식민지국인『앙골라』(Angola)를 새로운『시온』의 땅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헤르츨』박사의 갑작스런 서거로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하나님의 약속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케 하는 사단의 집요함은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성경의 첫 약속인 구세주(그리스도)의 약속을 제거하기 위해 로마교황청은 창세기 1-3장을 ‘신화 또는 설화’등으로 취급해왔으며『칼 바르트』, 프린스톤 신학교의『메츠거』(Bruce Metzger)등은 이 로마교황청 신학에 합류하였다. 그는 로마교황청 신학자들과 공동으로 성경번역작업으로 출간한 NRSV(New Revised Standard Version)의 구세주 예언장인 시편 2편에서 “아들에게 입맞추라”(Kiss the Son, Ps.2:12)를 “발(교황의 발)에 입맞추라”로 변개시켜놓은 구절에 동의한 자이다. 메츠거 교수는 로마교황청을 비밀리에 방문, 교황을 만나고 돌아온 후 세상을 떠났다.
20세기의 중동에 이스라엘이 다시 건국되리라는 가능성은 성경학자들까지도 실현불가능한 꿈으로 보았다. 『시온주의자』들은 새 이스라엘의 건국을 두고 영국의 제의를 깊이 숙고하고 있었다. 즉, 남아프리카의 포르투갈의 식민지국인『앙골라』(Angola)를 새로운『시온』의 땅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헤르츨』박사의 갑작스런 서거로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하나님의 약속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케 하는 사단의 집요함은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성경의 첫 약속인 구세주(그리스도)의 약속을 제거하기 위해 로마교황청은 창세기 1-3장을 ‘신화 또는 설화’등으로 취급해왔으며『칼 바르트』, 프린스톤 신학교의『메츠거』(Bruce Metzger)등은 이 로마교황청 신학에 합류하였다. 그는 로마교황청 신학자들과 공동으로 성경번역작업으로 출간한 NRSV(New Revised Standard Version)의 구세주 예언장인 시편 2편에서 “아들에게 입맞추라”(Kiss the Son, Ps.2:12)를 “발(교황의 발)에 입맞추라”로 변개시켜놓은 구절에 동의한 자이다. 메츠거 교수는 로마교황청을 비밀리에 방문, 교황을 만나고 돌아온 후 세상을 떠났다.
십자가의 강단을 진정 십자가로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곳으로 세우소서:
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십시오.
2) 나 자신의 성취, 경험이 아니라 홀로 세상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크신 사역을 부각시키십시오.
3) 나 자신, 나의 결정에 초점을 두지 말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엡3:8)함에 두십시오.
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십시오.
2) 나 자신의 성취, 경험이 아니라 홀로 세상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크신 사역을 부각시키십시오.
3) 나 자신, 나의 결정에 초점을 두지 말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엡3:8)함에 두십시오.
이것만이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되심’을 유감없이 증거하는 것이며,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서신서’로
들어
가면서 ‘그리스도 예수’로 바뀌는 진리와 함께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찬 511 / 내 구주 예수를 ①)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찬 511 / 내 구주 예수를 ①)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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