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8일 금요일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30 >








0143. 교회연합이라는 땅 위의 바벨탑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영역 안으로 침투해 들어와 기승을 부리는 옛 로마제국에 뿌리를 둔 두 단어 -즉‘종교’(‘religio’-Lat.) 다원주의와 ‘에큐메니즘’- 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는 영적 진통을 치루고 있다. 어거스틴의 영향하의 교권주의자들은 사단의 ‘교회연합’을 부르짖으나 그리스도의 교회의 사명은 교회연합이 아닌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었던 바울이 가르친 그리스도 교회의 전도사명이다. ‘에큐메니칼’운동에 빠진 자들은 요한 17:11“거룩하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자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kjv)-을 본문에서 떼내어 에큐메니즘의 슬로건으로 악용하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은 이미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과, 이 구절은 우리가 목표로 두고 도달해야하는 어떠한 것을 다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하나되라’고 명한 말씀이 아니라, 이미 하나되어있는 제자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시도록 아버지께 간구하는 ‘주님의 기도’이다. 에베소서, 골로새서를 통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도 ‘에큐메니칼’적인 교회를 암시한 곳은 아무데도 없다.

기독교회사 2,000여년사에 단 한번도 조화를 이뤄본 적이 없는 무리들과 멍에를 함께 매겠다고 하니, 필자가 30여년을 보아온 유럽 교회의 현실이 우리의 앞날이 될까 심히 두렵기까지 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당연히 분리된 기독교와 천주교와의 관계를 “부끄러운 분리”(shameful division)로 보는, 그리하여 언젠가는 ‘화해와 일치가 필요한’ 관계로 보는 어리석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도자들의 무지몽매함에 기인한다. 많은 유럽 대학의 신학부 안에는 ‘복음주의 신학부’와 ‘카톨릭 신학부’가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고후6:15)을 조화시키느라 대학의 심장부가 이미 곪아터져 그 냄새는 교회, 사회로 들어가 악취를 풍기면서 적(Anti-)그리스도의 모형의 하나인 『히틀러』같은 악마를 구세주로 영접한 영적소경들이 되는 것이다. 그 결과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오늘날 교회의 현실에도 분명하게 그 조짐을 나타내보이고 있다.

교회가 아무리 많아도, 많아서 일어나는 문제보다는 교회가 연합하여 조직적으로 하나되는 것보다 더 끔찍하고도 무서운 것이 없다는 사실을 ‘히틀러’ 정권 때에, ‘신사참배’시기를 통해 이미 경험하였다. 천지가 개벽한 이후로 가장 거대하고도 조직적인 이단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단교주의 이름은 우리 주님의 이름을 도용한『적(Anti-, 反)그리스도』로 그의 신도는 온 세상과 연결되는 ‘인터넷 공동체’로 온라인(Online)을 통해 통제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서 교단신학의 사슬에 매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그 많은 지도자들, 개혁신앙을 부르짖으나 개혁자들이 재발견한 하나님의 말씀, 개혁자들이 건네준 ‘말씀’은 버리고 ‘인간’신학자들의 무덤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유행을 쫓는 신학자들, 설교하기 위해서는 대양(大洋)을 건너다녀도 듣기 위해서는 길도 건너지 않으려는 영적자만심에 빠진 자들은 진리에 대하여 항상 새롭게 알려는 자세가 부족하여,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악을 선하다하며…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스스로 지혜롭다…명철하다…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한…”자들에게 성경은 4번이나 “화있을진저”로 경고하고있다. “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義)를 빼앗는도다”(사5.18-23).

악한 것을 알고도 선한 것으로 꾸미려는 편견에 사로잡힌 자들은 필자의 글이 지나치다는 생각을 가질 것이나 저들은 한 나라가 천주교화된다는 것이 얼마나 처절하고도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지고 온다는 사실에 무지할 뿐아니라, 입을 다물면 자신은 편할지 모르나 자녀들이 맞이할 세상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분들의 소견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로마종교(천주교)가 들어간 나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라. 저들의 악(惡)한 열매들을 보고 혼절(昏絶)하리라. 사단의 사슬에 결박당한 자를 자유케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결박당했음을 알려주어야한다. 이 로마종교에 대하여는 옛 선지자들이, 사도들이, 또 우리 주님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여러 번 경고하셨다. 지옥으로 향하고 있는 영혼들을 향하여 경고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미움이 어디 또 있을 것인가?!

0144. 진리의 영, 미혹의 영

신복음주의는 그리스도 교회에서 시작된 운동이 아니라 세상극장에서 공연된 운동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쳐지고 극장용어 ‘프로그램’을 도입, 관객(교인)들을 즐겁게 해주어야한다. 그러니 ‘회개’가 무슨 인기가 있겠는가? 의자도 극장처럼 편한 것으로 시설을 꾸며야하고, 스크린이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때로는 늘 보는 중앙의 십자가도 가려야한다. 어두운 초롱불 밑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던 전도자들의 복음은 하나님의 역사를 동반하였으나 대형스크린에 문짝만큼 크게 부상되는 설교자의 얼굴을 못 보면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지? 참으로 기구한 말세교회들의 관람객 유치를 위한 방법론, 노력들이 너무나 세상적이다. 기독신앙의 기본이자 근본인 내적문제인 ‘죄 회개와 자기부인(自己否認)’이 사라지고 가시적이고 외적인 치장에 너무 요란하다. ‘자기부인’의 전형적 모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주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지않고 나를 따르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8 kjv)고 일축하신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가 믿어야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아가 그 위에서 또한 죽어야하는 십자가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고 그리스도인의 십자가도 있다. 고난을 제거하고 세상에서의 영광만 구가하는 신복음주의의 성경공부는 악(惡) 그 자체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싫어할 뿐 아니라 하나님은 늘 자기를 대적한다고 느끼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이라는 생각자체를 거부한다. 그리하여 자기가 만든 신(神)이 바로 자기자신이 된다.
자아에 몰두하는 것은 모두 분쟁, 다툼, 전쟁의 핵심적인 원인이다. 교만은 모두 개인적, 사회적, 국제적 불협화음의 뿌리가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나서야 진정한 화평이 가능하다. 거짓사랑은 진리를 더럽히고 희생시키나 참사랑은 정의보다 강하며 십자가사랑의 요구를 보여준다. 우리를 겸손케하는 그리스도 사랑의 엄격성만이 죄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죄의 거짓됨에 대해 대결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거하는 삶은 자기추구적 삶을 철저히 거부한다. 자기 개인의 성공을 목표로 하고 부추기는 삶, 즉 자기중심적 영광을 구하는 삶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는 전혀 양립(兩立)할 수 없는 모순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 각자가 “진리의 영, 미혹의 영”(요일4:6)중 누구의 인도함을 받고 있는지도 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점검해야한다. 미국 동부와 서부의 두 신학교(Regent, VA / Fuller, CA)의 대학원장들이었던『빈슨 사이난』과『피터 와그너』는 정기적으로 로마교황청을 들날락하면서 북미교회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신학계를 크게 오염시켜온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많은 교회가 교인들이 좀 많다고 생각되면 “주의 만찬”시에 성도들을 앞으로 나오게하여 세워놓고 본의아니게 천주교의『미사』(Mass)행위를 하고서는 놀라는 목사님들을 만나게된다. ‘주의 만찬과 미사의 차이’에 대하여 앞으로 다루게 되길 바라지만 우리는 지금 배도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는 지라 말씀의 등불을 밝혀 놓지 않는다면 쉽게 속아 곁길로 가게된다. “그리스도가 아닌 것은 무엇이든지 길이 아니라 오류이고, 진리가 아니라 거짓이며,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다”. 『루터』의 가르침이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4:1)고까지 권고하고 있다.

0145.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성도들에게는 광명한 아침이 되겠지만 그렇지못한 자에게는 영원한 어둠이 될 것이다. 주님의 초림 때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처럼, 주님의 재림때에도 어두움에 속한 자에게는 밤이 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6:13)고 권고한다. 우리는 교회시대의 끝을 보려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새시대운동/새세계질서의 세력에 의해 전도와 선교에 의한 개종이 불법(不法)으로 간주될 날이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어떤 지역에서는 이미 이 불법이 활동 중이다). ‘단일세계정부/단일경제체제’(One World Government/One World Currency)에 의해 ‘현찰없는’(cashless)사회로 들어갈 준비가 다 된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이 세상의 특성이 유동성, 불확실성이라면,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변치않는 예수님의 복음을 가진 우리의 사명은 무엇인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에 가장 가까운 듯 하면서도 기독교가 아닌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모방자 사단의 걸작품이기 때문이다. 종교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늘 악(惡)의 병기로 이용당한다. 사단은 정확무호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과 겨루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으면서도 3번이나 “만일”이라는 말로 예수님을 유혹하지 않았던가?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눅4장/27장).

사단은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의 아비다. 배도는 이미 시작되었고 늘 평화의 이름으로 파괴를 자행(단8:25)해온 자들은 에큐메니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또 다시 우리 앞에 서 있다. 가슴이 답답해진 전도자가 파수꾼을 향해 거듭 묻는다: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수꾼이 답한다: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지니라”(사21:11-12).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소서
(찬 188 / 만세 반석 열리니 ③)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예수님의 마음치유



제 17 장 내적 치유과정의 주제들



우리 부부의 내적 치유 학교나 집회에서 전해지는 중요한 주제는 대략 “열 가지”로 요약된다. 물론 강의는 이 주제들에 국한되지 않고 참석자들의 상황과 질문에 따라서 삶의 여러 가지 문제를 폭넓게 다루게 된다.

주제 3 : 노력해도 고쳐지지 않는 성품과 성격의 문제점 뒤에는 모든 경우 숨겨진 원인이나, 과거의 사건들 (상처와 아픔의 씨앗들)이 있다.

자신의 성품에 백 프로 만족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씩 마음에 들지 않는 성품이 있다. 우리는 그 성품들을 고쳐서 원만하고 인정받는 사람이 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쓴다. 그런데 무언가 되는 것 같으면서 계속해서 실패하고 실수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 아닌가?
우리가 그렇게 애를 쓰는데도 원하는 열매가 잘 맺히지 않는 데에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숨겨진 원인이나 과거의 좋지 않은 사건들이 있기 때문이다. 상처와 아픔의 씨앗들이 오래 전에 뿌려졌고 그것이 내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왔고 이제는 하늘을 덮는 가시덤불이 된 것이다. 우리는 그 가시덤불 길을 지나다니면서 찢기고 넘어지고 좌절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 고쳐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는 말이다. 그 뿌리들을 찾아내고 주님의 말씀의 약을 치면 지상에 나와 있는 줄기와 열매들, 즉 눈에 보이는 좋지 않은 성격과 성품이 자연스레 시들어가고 죽어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주제 4 : 내 마음에 어떤 상처와 아픔의 씨앗들이 떨어졌고 얼마나 자라왔는가를 성령님은 나에게 “인격적으로”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신다.

환자로서 병원에 가서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통증을 없애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통증의 원인”을 찾아달라고 하는 일이다. 원인을 찾지 않고 통증을 제거하면 병을 더 키우게 된다. 우리 내면세계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를 아프게 하고 여러 관계를 망가뜨리는 원인을 찾기만 하면 치유는 시간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진단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님을 “오해”하고 있다. 인격적인 하나님이기보다는 어떤 초월적인 능력으로 (Super power) 생각하고 성령님에게 그런 일을 부탁하고 기대한다. 어떤 서양 교회 집회에 갔더니 유명한 설교자가 두 손가락을 높이 들어서 전기 콘세트에 꽂는 동작을 하게 한다. 성령님의 능력 (POWER)에 연결되어야 한단다. 인격적인 성령 하나님을 내게 주시는 “능력”으로 격하시키는 아주 잘못된 가르침이다.

많은 경우 성령님은 일단 우리가 원하는 대로 도와주신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상처입고 울고 있을 때에 이유를 묻지 않고 바로 응급 처치를 해주는 엄마의 손길과 같다. 그러나 육신의 부모도 언제까지나 자녀들을 어린아이로 취급하기를 원하지 않듯이 성령님께서도 항상 우리의 기도를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응답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제대로 성숙해서 당신과 ‘인격적인 만남’을 갖게 하시는 것이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님은 어떤 신령한 사람을 통해서 우리 내면세계의 모습이나 아픔들을 알려주시기를 원치 않으신다. 당신의 자녀 한 사람 한 사람과 일대일로 만나시며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그 진단 작업을 수행하시기를 원하신다. 우리들이 문제를 드러내 놓고 부모와 형제자매들과 나아가서 자녀들과 인격적인 대화를 하기를 원하신다. 그 대화 중에서 성령님께서 나 자신, 부모, 자녀들의 문제의 뿌리를 드러나게 하시는 것이다.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 saranghealing@hanmail.net
 
 
 
 
 

정성헌선교사의 선교칼럼



믿음을 건축하다- 1.도전



추방된 지 7개월 만에 선교지로 돌아왔다. 그러나 더 이상 거주등록을 할 수 없어 가족을 수도에 두고 비거주 사역을 시작했다. 사역지에서 170키로 미터 떨어진 인근 도시로 가서 다시 택시를 타고 잠입해 들어갔다. 성도들로 북적거리던 사택엔 정막만이 지키고 있었다. 창틀에 내린 누런 흙먼지가 주인 없이 지난 시간을 말하는 것 같았다. 감개무량하고 감사하기 그지 없었다. 다시 돌아와 섬길 수 있도록 해 주신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우리 가정이 추방되어 한국에 머무는 동안, 자체건물을 가지지 않은 종교단체의 등록을 취소한다는 신종교법이 발효되었다. 개척한 교회는 ‘고려인문화센터’를 임대하여 국가에 등록을 했었다. 그러나 내가 없는 사이 교회등록이 취소되었고, 법적으로 공적 모임을 할 수 없어 성도들은 소그룹으로 모이고 있었다. 돌아온 교회에는 산적한 문제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속히 새로운 예배처소를 구입하거나, 예배당을 건축해야 했다. 도착한 사택 마당에서 기도를 하는데 사택 맞은 편에 예배당을 건축하라는 음성이 들렸다. 사택 부지가 넓었기 때문에 공간은 충분했다. 그런데 10월 26일 기공예배와 함께 건축을 시작하라는 음성이 이어졌다. 나는 난감했다. ‘정말 이것이 주님의 음성이란 말인가? 10월 말에 어떻게 건축을 시작한단 말인가? 11월 초면 눈이 오기 시작하고…… 겨울은 최저 영하 25도까지 내려가는데, 어떻게 겨울에 공사를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인지? 내년 봄이면 몰라도…….’

한 참 고민스러운 마음을 모우며 기도하는데 사택에서 요란하게 전화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열쇠로 열고 들어가 전화수화기를 들었다. 수화기에선 믿기지 않게 파송교회 교구담당목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부산 본사의 오부장입니다. 잘 도착하셨는지요? 저희가 손을 모으는 중에 회장님이 그 곳에 사옥을 지으라는 말씀을 하셔서 사장님의 허락을 받고 저희가 적극 돕기로 했습니다.”
너무도 놀라운 일이었다. 추방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곳에서는 국제전화가 되질 않았다. 그런데 처음으로 걸려온 전화가 파송교회에서 온 국제전화이고, 예배당을 지으라는 내용이었다. 통신사정이 좋아 진 이유도 있겠지만, 나는 주님이 주시는 증거로 받아들이고 마음을 확정했다.

목사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성도들이 사택으로 달려왔다. 기쁨으로 다시 해후하게 된 것이다. 몇 일이 지나자 성도들을 모아 예배당 건축계획을 의논했다. 교회등록과 함께 합법적인 모임을 위해서 자체건물이 필요하다는 것은 다 동의했지만, 10월 26일 기공예배를 드리고 건축을 시작하겠다는 나의 말에 모두가 의아해 했다. 성도들은 겨울이 시작되는 시점에 무슨 공사냐는 의구심을 품었지만, 다시는 못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던 목사가 다시 돌아왔으니 하자는 대로 따르는 입장이었다.

건축을 결정했지만 풀 뿌리 수준의 성도들과 함께 건축을 해야 한다는 것이 고민이었다. 그리고 법적으로 외국인이 종교단체의 활동에 개입할 수 없는 입장이고, 안 밖으로 위험요소도 많았다. 제일 큰 고민 거리는 건축자재를 구하는 문제였다. 계획경제였던 쏘련 연방이 해체되면서 그 곳엔 그 때까지 7년이 지나도록 건축자재시장이 형성되질 않고 있었다. 건축자재를 시장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국가기관이나 개인 집에서 사와야만 했다. 그것도 대부분은 장물이었다. 그리고 건축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지…… 현지 사정을 알면 알수록 나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볼료자가 나를 찾아왔다. 볼료자는 교회가 개척되자 온 가족이 교회에 나온 첫 가정이다. 그는 극동 하바롭스크에서 태어난 고려인이다. 그의 아버지는 1947년 시베리아 벌목공으로 왔다가 돌아가지 않고 러시아에 정책했다. 가정을 이루었으나 삶이 어려워 쌀 농사를 지으러 아랄까지 흘러 들어온 가정이다. 그는 그곳에 자라 학교교사를 했고, 요식업으로 돈을 많이 벌기도 했다. 그리곤 한 때 놀음에 빠져 많은 재산을 날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도시 중심에 두 개의 가게를 운영하는 재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대화 도중 볼료자는 예기치 않게 불쑥 자신에게 건축을 맡겨 달라고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을 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수도에서 건축으로 빚어진 현지인들의 재정사고를 보고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는 함께 기도모임을 하던 동료선교사의 교회에서 벌어진 사건도 있었다. 그 교회의 건축을 맡았던 고려인이 막대한 재정을 들고 모스크바로 도망을 쳤고, 동료선교사는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도망친 사람의 장남이 교통사고로 하반신 불수가 되었고, 얼마 후 본인도 교통사고로 객사하여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일도 있었다.

나는 볼료자에게 왜 힘든 건축을 맡고자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하나님의 집을 짓는데 자신이 꼭 헌신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건축을 맡게 되면 많은 돈이 오가고, 늘 그 곳에서 부정부패를 보아왔던 불신자들과 성도들 사이에서는 자신에 대한 수많은 오해와 억측이 난무할 텐데 그 짐을 어떻게 지겠냐고 물었다. 그는 말이 없었다. 나는 성도들 중 누구에게 이 일을 맡기더라도 자신의 예배당을 짓는 일이니 어떤 보상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진정한 명예와 돈은 한 번에 취할 수 없는 일임을 설명하려 했다. 볼료자는 내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차리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목사님, 저는 돈 때문에 이 일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집을 짓는 일에 섬길 기회가 주어지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교회음악 Plus





찬양대원은...



찬양대원은 참 그리스도인으로 구별 된, 주님을 찬양하는 사람으로서, 영적으로 구별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회 생활은 물론, 사회생활, 가정생활에서도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영의 사람이어야 한다.

찬양대원은, 음악적인 은사나 자질(재능)과 음악에 대한 열심과 열정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찬양대는 다른 사람들 보다 일찍 교회에 나와야 하고, 연습 후에 늦게 돌아가야 하고, 그 외에도 특별한 절기(부활절, 성탄절 등)나 특별한 행사(창립기념, 찬양의 밤 등)가 있을 때에는, 또 특별히 시간을 더 내어야 한다. 이런 때에 열의가 없으면 이 모든 일들이 귀찮고 재미가 없는 일이 되고 만다. 하지만 열의가 있으면 아무리 힘든 일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찬양대원은, 성실한 사람이어야 한다. 자신을 잘 관리하여, 항상 찬양할 수 있도록 몸을 관리하며, 감정과 생활을 성실하게 관리하여, 피곤하더라도 생활의 바쁜 일이 생기더라도, 성실하게 자기의 자리를 지키며, 기도로 모든 환경과 형편과 자신의 마음과 몸의 상태를, 주님께 드리는 찬양이 방해가 되지 않도록, 성실하게 연습과 예배에 임해야 한다. 찬양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성실하게 출석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다.

홍동근 / 목사, Music Minister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






북한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이번 주에는 지난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 시리즈에서 나눈 내용을 보충하는 차원에서 나누고 3월 한 달은 다양한 주제의 내용을 나누려고 합니다. 지난주에도 나누었지만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이라는 큰 주제안에서 ‘통일’에 대한 정의는 성경적이고 본질적인 관점에서 다루었고 ‘한민족의 부르심’에 대한 거대한 내용은 다루지 못하고 먼저 북한내부의 정치·경제가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어떻게 흔들리고 변화되어왔는지에 대해서 전문가가 아닌 지극히 일반인의 관점에서 아주 간략하게 나눴습니다. 아직 ‘한민족의 부르심’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다루기에는 이르다는 판단 하에 이 주제는 자연스러운 인도하심에 맡기고 다시 다루기로 합니다.

‘북한’을 떠난 적 없으신 하나님!
‘통일과 한민족의 부르심’이라는 시리즈의 마지막 10편을 마치면서 저는 ‘북한을 휩쓸고 있는 한류열풍이 만들어가는 북한에서의 통일준비’에 대해 다소 상세하게 나누었습니다. 남쪽 사람들이 북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북한의 시장경제의 활성화로 인해 틈새로 들어간 남한의 문화를 통해 어떻게 북한이 ‘남한화’되어가고 있는지, 그래서 북한에서의 자동적인 ‘통일연습’을 바라보며 감사한 부분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초점은 당연히 복음의 문이 더 열리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번 주에는 지난 10편에서 나눈 내용에 이어 북한 내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북한 내의 ‘지하교회’ 존재여부에 대해서는 이제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연히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자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북한에서 ‘지하교회’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지만 수적으로도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북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통일운동 또는 통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가끔 강의에 나가서 ‘북한에 지하교회가 있나요? 있다면 몇 명 정도로 추산하는가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잘 정리를 해서 말씀드리지만 마음이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궁금할 것입니다. 최소한 공식적으로 90년대 이전까지는 북한의 ‘지하교회’ 존재여부가 질문거리조차 되지 않았으니까요. 왜냐하면 북에서의 종교말살정책과 더불어 북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처형하고 없앴다는 것은 남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래서 그렇게 확고히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온, 세상의 모든 역사위에서 일해오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역사가 북한 땅에서도 있어 왔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북한이 하나님을 버렸기에 저주를 받았고 그곳에는 하나님이 안계신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성경의 역사를 통해서도, 지구촌의 지난 역사를 통해서도 우리가 분명히 인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환란과 핍박이 있어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신 놀라운 ‘복음의 역사’는 그 분의 열심으로 결코 한번도 멈춘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진정 궁금해야 하는 것은 북에 지하교회가 또는 그리스도인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 땅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찬양하며 기도하며 우리도 ‘통일준비’에 동참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순교의 피가 뿌려지고 있는 그 땅의 이기는 자들을 통해, 마지막 때 이 민족을 들어 쓰시려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이제 우리는 보아야만 하고 나는, 우리는, 우리 대한민국 교회는, 디아스포라 한인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사명의 자리’를 찾아야만 합니다. 북한 내에 불고 있는 ‘남한열풍’을 능가하는 ‘복음확산의 역사’는 오늘도 진행 중에 있습니다. 통일!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꿈이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소망이고 비전입니다! 할렐루야!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