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30일 목요일

기쁨을 묻다 - R. T. 켄달



기쁨을 묻다 - R. T. 켄달




예수 믿고 살아가는 삶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맛’은 무엇일까요? 세상사람들과 다르게 살게 원할 때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게 할 그 무엇이 있는지요? 상황과 환경의 굴곡을 경험하는 때에는 결코 놓을 수 없는 기쁨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는가요? 신앙생활은 무미건조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집중하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에 목말라 있습니다. 작은 선행이나 실천에도 다른 사람의 인정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인정만으로 만족하고 사람들의 칭송을 일부러 구하지 않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통째로 삼켜도 해갈되지 않는 그 욕구를 가진 우리에게 주님은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참된 영광은 없습니다. 바울은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라고 고백합니다.

종교적 권위나 자기 의를 포기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실패하면 우리는 진짜를 놓치게 됩니다. 이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함을 위해 알고 인정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고 싶은 유혹을 이길 힘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비밀스러운 경험’인 진정한 만족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이라도 주님을 섬겨 행하는 어떤 일에서든지 사람보다 하나님의 칭찬을 구하겠다고 다짐하고 실행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하박국 처럼 ‘구원의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게’될 것입니다. 즐거움은 상황에 따른 반응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으로 만족하겠다는 ‘결단’의 결과입니다.

성령 안에 거하는 삶온 우주를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영으로 내 안에 거주하심은 얼마나 놀라운 경험이고 은혜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문제는 성령의 인도를 구하지도,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구하지도 않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직접 교제하고 싶어 하십니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참여하는 축복의 일부분입니다. 성령의 내주와 성령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과 임재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는 인도, 교리를 깨달음, 기도 응답, 영 분별 등다양한 경험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의 핵심적이고 필수적인 증거는 기쁨, 즉 온전한 기쁨입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하나님과 십자가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런 기쁨을 얻습니다. 성령과 동행할 때 우리는 풍성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여 줄 때 우리는 쓴 뿌리에서 놓이게 됩니다. 우리는 또한 성령께 민감해야 합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음행, 탐욕, 추잡한 말, 점잖지 못한 농담, 독설, 격정, 분노, 욕설은 성령을 근심케 합니다.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길과 방식을 배웁니다. 진정한 동행을 위해서는 반드시 함께 시간을 보내야만 합니다. 또한 성령과 더불어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과 걷는 길이 가장 좋은 길이고 행복한 길입니다.

불가능한 기쁨인생에서 때로 시련을 만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시련도 결국은 끝나는 법입니다. 시련을 기쁘게 받아들이면 ‘너는 나의 영광’이라고 영예를 부여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시련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 재정적 어려움, 상실, 질병, 오해, 실패, 실망, 배신, 학대, 실업, 해고, 정신적, 감정적 우울증, 사고, 외로움 등 다양하게 옵니다. 하나님은 권면하십니다:
시련을 환영하라, 두려움에서 벗어나라, 가난한 심령을 가지라, 하나님이 시련을 허락하셨음을 기억하라, 끝내려고 애쓰지 말라, 불평하지 말라, 하나님의 기대를 기억하라.
때로 시련 중에 우리는 멀리 계신 것 같은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잭 테일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고통스러운 상황이 지속된다면,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우리가 아직 듣지 못했다는 뜻이다. 시련이 계속되는 것은 시련을 통해 이루어야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장벽을 넘어 하나님을 더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의지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천국을 보는 믿음사실상 이 땅에서 우리는 나그네와도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진정한 본향을 향한 영혼의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자주 우리는 이 땅에서 떠나지 않을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하늘 소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또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이 있다고 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10:42).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이 행한대로 갚으리라”(마 16:27) 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잘했다”고 칭찬하시면 그것이 최고의 기쁨입니다. 이는 가장 높은 수준의 기쁨입니다. 지상에서 가장 큰 행복은 하나님을 기다리다 결국 그분의 역사를 보는 것입니다. 더욱 풍성한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778-868-3063 / Ezekiel475k@gmail.com]

그동안 ‘마음이 이어질 때’를 연재해 주신 김영남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인】

대기 만성

 
 

대기 만성

 
 
 
한국에서는 인성교육에 치중해야할 유치원에서 부터 ‘등수’ 경쟁이 시작되고 있다. 유치원 때부터 그렇게 해야 일류 대학에 들어 갈 수 있고 일류 직장엘 갈 수 있다고 한다. 일등이 되기위한 줄서기 경쟁에서 선두에 선 사람들만이 일등 신랑, 신부감이 되고 이들이 같은 부류의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면 최고로 성공한 젊은이라고 여기는 것이 한국 사회이다. 옛날에는 가난한 집 아이들도 공부를 열심히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어 소위 ‘개천에서 용이 나왔다’는 말이 많이 통용되었다. 유치원에서부터 시작된 경쟁에서 선두에 들면서 대학까지 졸업을 하려면 수억 원의 교육비가 들어가야 한다는데 이는 가난한 집에서는 도저히 감당 할수 없는 거액이다. 그래서 요즈음 한국에서 가난한 집을 의미하는 즉 ‘개천에서는 용은 커녕 미꾸라지도 나오기 힘들다’는 말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드는 교육비를 투자하고 열심히 공부만 한다고 다 일류대 좋은 ‘꽈’에 갈수 있는 것도 절대로 아니다. 소위 일류 중에 일류라는 몇 개 대학에 들어가서 최고인 대기업 직장 군에 들어 갈수 있는 사람은 전체 대학 응시자중 2%도 안 된다. 그럼으로 대학응시자중 일류대에 들어가지 못하는 절대 다수가 패배자 즉 요즈음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용어로 ‘루져’가 되어 인생 출발점에서부터 실망과 열등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전체 대학 응시자가 2%내에 들어가기 위하여 ‘너죽고 나살자’ 식 경쟁의 길로만 가야 하는 가를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산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길은 산 반대쪽에서도 오를 수 있는 길이 있는 등 반듯이 여러 개의 길이 있다. 그리고 산 정상에 올라야 한다는 변치 않는 끈질긴 의지와 집착만 있다면 정상에 오늘 못 오르면 내일 완성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서울대, 고대, 연대 등 소위 잘 알려진 일류대학에 진학하는 것만이 정상에 오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우물안 개구리 같은 생각을 떨쳐버리고 우물 밖의 세상을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산 반대쪽에도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길이 무수히 존재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세계에는 삽십 오만 삼천개나 되는 많은 대학들이 있는데 그중 소위 최고 일류라고하는 100개 대학의 명단이 매년 발표되고 있다. 2012년 자료를 살펴보면 톱 100위 안에 들어있는 일류 대학이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으로 34개의 대학들이 미국에 포진하고 있다. 그리고 영국에 18개, 호주에 7개, 독일과 일본에 6개, 캐나다, 스위스에 4개, 불란서와 한국에 3개 대학들이 자리잡고 있다. 100위 안에 들어있는 한국 대학 순위를 보면 이제는 전교 1등 해도 입학이 쉽지 않다는 서울대가 51위에 불과하며, 포스택이 68위, 그리고 카이스트가 94위에 있다. 그리고 캐나다의 대학을 보면 토론토대 27위 UBC 37위 맥길 65위, 맥마스터 91위로 되어있다. 이들 정규대학 말고도 자기 적성에 따라 갈 수 있는 교육과정들은 대학보다 더 많은데 한국 사람들은 성공의 길로 4년제 정규 대학 과정만 고집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적성은 고려되지 않고 장래에 편안히 돈을 잘 버는 길로만 자녀들을 몰아가고 있다.
한국에는 이 백개 가까운 4년제 대학이 있다. 상위 12개 대학들의 2012년도 순위를 보면 서울대, 카이스트, 포항공대, 연대, 고대, 서강대, 성균관대, 한양대, 외국어대, 이화여대, 중앙대, 경희대 순으로 되어 있다. 이중 2개 대학만 지방에 있고 모두 서울에 위치하고 있으며 20위까지 대학을 살펴봐도 거의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서울에 있는 대학에만 입학해도 모두가 최고 명문인 ‘서울대학’에 입학한 것이란 유행어가 나온 것 같다. 세계 랭킹에서는 연대가 203위 고대는 236위에 있으며 그 밖의 모든 한국대학들은 세계 랭킹순위에서 세계적인 잣대로 볼 때는 그저 그런 대학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학부모들은 이 학교들에 자녀를 입학시키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다.
교포 자녀들이나 유학생들이 외국유명 대학에 입학하는 수는 해마다 괄목할만하게 늘어나고 있다. 특별한 몇 학교를 제외하고 어지간하게 노력하는 한국학생들이면 세계 100위권 내에 있는 유명학교에 어렵지 않게 입학들을 한다. 그러나 입학한 학생수에 비하여 끝까지 학업을 마치고 학위를 취득하는 학생 수는 적어 중간에 학업을 포기하고 도태되는 학생 수가 한국 학생이 타 민족에 비해 최고 으뜸에 달하고 있다고 한다.
그 원인은 세가지 관점으로 분석되어 진다. 첫째는 한국학생들은 주입식이나 암기식 방법으로 공부를 해 왔는데 연구와 토론에 바탕을 둔 대학공부 방식에 익숙치 못하여 학업을 따라갈 수 없는 경우라고 한다. 그리고 두 번째는 전공분야가 본인의 적성과는 관계없이 부모 등 외적 작용에 의해서 결정되어 대학에 와보니 전혀 자기와 맞지 않는 경우라고 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목표를 향한 끈질긴 노력과 집착의 부족이라고 한다. 이곳의 대학공부는 지옥훈련과 같은 것인데 이를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는 학생이 적지 않다고 한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자녀이고 나의 형님은 불신자 인데 형님은 호주에 나는 캐나다에 정착하여 살고 있다. 형님은 두 아들을 두셨고 나는 딸과 아들이 있는데 이들 모두는 40대 중반이거나 40을 바라보는 연령이다. 형님과 나는 모두 자식들 교육문제가 주된 목적이 되어 이민을 하였지만 이민자로서의 형편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나는 가운데 시작되었다. 형님은 ‘시드니’ 부자동네에 호화주택을 직접 짓고 이민 아니 ‘이사’를 하셨다. 나는 형님보다 여러 해 먼저 호주로 이민하였지만 겨우 작은 집을 마련하고 여유없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때 형님가정을 초청 하였다.
조카들은 한국에서부터 특수학교에 다니는 등 부모로부터 아낌없는 교육투자와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그러나 장조카는 고려대에 공대가 있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때 고려대 공과대학에 겨우 들어가 부모에게 실망을 안긴 케스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둘째 조카는 일차에 낙방하여 이차 대학인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한성’대학에 겨우 입학이 되어 형님은 또 한번의 자녀 교육에 실망을 하시고 체면이 땅에 떨어지셨다. 그러던 중 고민 끝에 호주로 오셨다. 그 후 형님과 형수님은 모든 생활을 아이들 공부 뒷바라지에 혼신을 다하셨다. 다행히 장조카가 다니던 고려대가 한국의 명문대로 인정을 받아 세계 랭킹 50위 안에 드는 NSW 공대 원자력 공학과에 입학이 되었다. 하지만 한성대학에 적만 두었던 둘째 조카는 어느 대학에서도 입학이 허락되질 않다가 호주의 ‘메쿼리’ 대학이란 비교적 인지도가 떨어지는 대학 경제학과에 겨우 입학이 되었다.
그후 이들의 피나는 노력에 부모들의 노력이 더해진 결과는 기적을 낳았다. 공학 석사인 장조카는 현재 호주 원자력원의 수석 ‘엔지니어’로 호주에서 원자로를 구입 할 때면 구매팀장이 되어 미국엘 자주 오가고 있다. 한편 둘째 조카는 호주의 ‘켐브리지’라 일컷는 시드니 대학으로 전학을 하여 졸업하였다. 그 후 석사, 박사를 마치고 시드니 대학의 경제과 교수가 되어 있어 한국인의 자랑거리가 되는 기적을 낳았다. 2005년부터 세계 경제 학술지에 최다 연구실적을 싣는 시드니 대학의 유명교수로 자리하고 있다. 미국 TV 방송에 호주 경제를 설명하는 자리에 동양인인 조카가 나와 놀란 적도 있었다. 한국서 1차 대학에 낙방하고 방구석에서 소주만 들이키며 좌절했던 조카를 상상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이들 조카들이 한국에 있었다면 죽었다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이렇게 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이민 성공케이스다. 하지만 부모들의 노력과 희생은 필설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컸으며 교육 투자도 한사람 당 얼추 계산해도 거의 십억씩은 들어 간 것 같다.
한편,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의 행로를 살펴보면 부모인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아주 작고 모두 주님이 이끌어 오셨고 이끌어 가실 부분임으로 나의 의지와는 별개인 것임을 나는 확신하고 있다. 나는 그저 협력자였던 것에 불과하였다. 나는 형님이 자식들에게 한 것에 비하면 아이들 공부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학교에 적응할 만하면 이사를 하게 되거나 캐나다 또는 호주로 다시 이민을 하게 되어 아이들은 5군데의 초 중고등학교를 다녀야 해서 아이들에게 큰 혼란만 더해주는 부모였다.
딸아이가 공부를 잘한다고 내용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의사가 되라고 UBC 생물과에 입학시키는 무지함으로 아이들의 대학 교육이 시작되었다. 진로를 잘못 설정해 주어 딸아이는 다시 공부를 계속하여 다른 degree 따고 아직도 계속 공부하며 목표에 근접해 가고 있는 중이다. 현재는 포트랜드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 아들 녀석도 UBC 2학년을 마치고 진로가 확정되었었다. 그런데 중국아이들이 너무 많아 UBC가 싫다고 동쪽에 있는 맥마스터 상과대학으로 도망가듯 전학을 갔다. 나는 아이들이 대학을 다니는 동안 이민생활에 쫓기다 보니 많은 관심을 주질 못하였고 졸업식 때 마저도 참석을 못하는 무성의한 부모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가지 게을리지 하지 않았던 것은 아이들이 실천을 하던 못하던 만나기만하면 성경말씀 특히 잠언을 계속 읽도록 어려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계속 권장 하고있다. 그리고 설정한 목표를 향하여 쉬지 말고 끈질기게 노력할 것을 주문하였다. 나는 두 자녀를 둔 딸아이에게도 계속 공부하여 가르치는 사람이 되라고 용기를 주고 있는 중이다.
아들에게도 ‘철밥통’(노후까지 보장된다는 공무원의 별칭) 이라고 부르는 연방공무원으로 만족하지 말고 계속 공부하라고 채근해 왔다. 아들은 미국과 캐나다 공인회계사 자격들을 취득한 후 결혼 하고도 이제까지 끈질기게 열심히 공부하며 삼 차에 걸친 CFA(국제 투자, 재정 분석사)시험을 보았다. 아들이 최종 합격 통지도 이달에 받아 이달은 집안에 여러 경사가 겹친 달이 되었다. 나는 CFA를 정확하게 몰라 인터냇에 들어가 검색해 보았다.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라이센스’로 CFA라는 것이 있는데 법조계에서는 사법고시를 으쁨으로 치듯이 ‘상경계’ 에서는 CFA고시를 으뜸으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항만청에서 기업분석과 투자 관리를 맡고있는 아들의 업무에 권위있게 쓰임 받을 자격증이 되었다. 항만청에서는 청내 공무원들에게 CFA 취득을 오래도록 권장해 왔다고 한다. 항만청에 있는 유일한 한국인인 아들이 유일한 CFA 취득자가 되어 그 일을 해내 한국인의 위상도 높아 졌다고 전해주었다. ‘스텐리팍’과 밴쿠버 항만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새 집무실에 식구들을 초청하여 승진의 기쁨을 나누는 것을 본다. 형님과 비교하면 자식에게 혼란만 더하게 했지 별로 ‘서포트’도 못해준 것이 미안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겨자씨만 하지만 네 믿음과 하나님 일 열심히 해온 너를 보고 내가 네 자녀들을 너 대신 돌보아 왔느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가정에는 나의 형님처럼 피나는 부모의 노력과 엄청난 투자가 없었어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인도해 주고 계심을 확실히 본다. 나는 우리를 늘 축복해 주시고 계신 하나님께 특별히 감사하고 있다.
- 수필가 (밴쿠버 문협, 한국순수 문학) 김용규

2012년 8월 26일 일요일

‘철가방 우수씨’



윤학렬 감독 “영화 속에 작은예수를 담아내려 했죠”





72만원의 월급을 받으면서도 5명의 저소득층 어린이를 돕던 중국집 배달부가 있었다. 고아 출신으로 1평 남짓 고시원에 살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비결은 매일 읽던 성경에 있었다. 훈훈한 미담이 알려지면서 2009년 청와대 만찬까지 초청받았다. 그러나 그 배달부는 2011년 9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짧은 생애를 마무리했다. 고 김우수씨의 실제 이야기다. 그의 스토리를 담은 영화 ‘철가방 우수씨’가 오는 11월 개봉된다. 주인공은 탤런트 최수종씨가 맡았다. 메가폰을 잡은 윤학렬(46·일산 화평교회 집사) 감독을 23일 만났다.

“어려운 형편에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을 통해 5명의 아동을 7년간이나 도운 김우수씨의 이야기를 지난해 9월 처음 접했습니다. 새벽기도를 드리는데 계속 그분이 마음에 걸리는 겁니다. 그래서 그분이 일하시던 중국집과 서울 논현동 고시원도 직접 찾아갔어요. 문을 열었는데 5명의 후원아동 사진과 구약 817쪽이 펴진 낡은 성경책이 책상에 있더군요. 그 부분이 마침 시편 23편이었어요.”

서울예술대에서 영화를 전공한 윤 감독은 199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에 당선된 이후 방송작가를 시작해 19년간 SBS에서 대본을 썼다. 2003년 장나라가 출연한 ‘오 해피데이’가 그의 작품이다.

“시트콤이나 드라마에 왜 무당이 출연하고 ‘무릎팍 도사’처럼 역술인 콘셉트나 샤머니스트가 자주 나오는지 아십니까. 의식 있는 역술인들은 대중매체의 영향력을 정확히 알고 드라마 제작경비를 지원합니다. 대중의 마음속 은연중에 역술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각인시키는 것이죠.”

2008년 지인의 전도를 받고 회심한 윤 감독은 영상에 간접적이고 기호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야 한다고 고민해왔다. 그는 고시원을 방문한 날부터 10일 만에 원고지 1000매 분량의 대본을 만들어냈다. 자초지종을 들은 불교신자인 친구가 8억4000만원의 제작비를 댔다. 그해 10월 중순 소식을 접한 최수종씨가 “단숨에 대본을 읽었는데 18 년 만에 내가 해야 할 영화를 찾았다. 주연을 맡겠다”며 흔쾌히 수락했다. 탤런트 김수미씨와 가수 김태원씨가 자발적으로 연기와 음악으로 동참했다. 윤 감독은 “아마도 김씨의 스토리가 갖고 있던 진정성이 통했던 것 같다”면서 “하나님이 영화를 만드시려는 계획하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90분짜리 영화는 도시의 빨간 네온사인 십자가부터 김씨가 낭독하는 시편 23편까지 기독교적 가치관이 잔잔하게 깔려 있다. 윤 감독은 “자신의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인생이었지만 생명보험의 수령자를 5명의 어린이로 돌려놓고 장기기증까지 실천한 김씨의 삶은 작은 예수를 생각나게 한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철가방 우수씨’를 통해 나눔문화가 확산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왜 우리는 이렇게도 이기적일까요, 공개적인 일에는 나눔을 실천한다고 떠벌리지만 작은 일에는 왜 이리 소홀할까요. 영화를 통해 가장 낮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긴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진정한 나눔이 무엇인지도요.” [http://missionlife.kukinews.com/]


'묻지마 범죄’, 한국교회 예방대책은?



“사회 부적응자에게 꾸준한 관심과 애정 쏟아야”

미래목회포럼 논평

 
목회상담학자 “사회안전망 구축 목소리 높이고, 인성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 충실해야”
최근 한국사회는 불특정 다수를 향해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는 ‘묻지마 범죄’로 큰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다. 이와 관련 사회 전반적으로 묻지마 범죄의 발생 원인을 진단하고, 예방할 수 있는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사회의 각계 전문가들은 개인의 정신적, 성격적 장애로 묻지마 범죄가 발생하고 있지만 사회 병리현상으로 진단하는 것도 필요하다며 사회 및 경제의 양극화 현상으로 인한 소외감과 좌절, 상대적 박탈감이 누적되면서 극단적인 보복심리로 표출되는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특히 높은 실업률과 경제적 압박, 치열한 경쟁 등이 사회 전반의 불안과 긴장으로 연결돼 묻지마 범죄와 같은 현상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목회상담학자들도 이와 비슷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성결대 기독교상담학 전요섭 교수는 “묻지마 범죄는 스스로 감정 및 욕구 통제를 못하거나, 그것이 좌절됐을 때 범행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며 “어려서부터 자신을 통제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의 중요성을 가정과 학교에서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장신대 이상억 교수는 “개인적, 공동체적으로 갖고 있는 사회적 불만과 분노, 정서적 고립과 스트레스, 경제적인 어려움, 대인관계 기피 등 묻지마 범죄의 발생원인은 다각도록 분석할 수 있다”며 “신경정신과 측면에서는 일종의 정신질환, 성격장애, 알콜중독 등으로 인한 자기 통제력의 상실로 진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내재적 측면에서 ‘나는 존재할 가치가 없고, 세상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생각이 외부적으로 불특정 다수를 향해 범죄와 같은 잘못된 형태로 표출될 수도 있다”며 “묻지마 범죄의 경우, ‘나는 괴롭다, 사회가 싫다. 나에게 관심을 갖고 집중해 달라’는 것으로 범행동기도 불분명하고, 죄의식이나 죄책감 같은 것도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묻지마 범죄의 가해자가 될 수도 있는 사회 부적응자나 반사회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꾸준한 관심과 애정을 갖는 등 가난과 소외, 애정 결여 등의 열악한 환경에 처한 이들을 돌볼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미래목회포럼의 경우 지난 23일 논평을 통해 “묻지마 범죄의 희생량이 우리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심정으로 교회와 성도들이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밝혔다.

미래목회포럼은 “최근 급증하고 있는 ‘묻지마 범죄’에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안타까움과 함께 심각한 우려를 표한다”며 “애꿎은 사람들의 희생이 다시는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정부나 사회가 사회적 안전망 확보에 주력해야 한다” 촉구했다.

특히 “현 상황에서 정부는 이성보다는 감정에 치우친 여론을 넘어 근본부터 고쳐나가려는 정책적 노력을 펼쳐야 한다”며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와 관심, 제도적 보호 장치 등의 정책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피력했다.

미래목회포럼은 “한국 교회도 이웃들이 복지 사각지대에 놓이지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며 “교회가 지역사회 안에서 이상 징후를 진단해 이를 예방하고, 치유하는 방안에 대해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한 “주변의 사회 부적응자나 반사회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꾸준한 관심과 애정을 보여야 한다”며 “가난과 소외, 애정 결여 등의 열악한 환경이 가중돼 사회적 외톨이가 양산되는데, 여기에 교회를 향한 기대와 역할이 있다. 소외계층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곧 이 시대 교회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묻지마 범죄’ 예방을 위해 교회는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호남신대 김진영 교수는 “한국 교회가 이와 같은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정책이나 기구를 만든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교회는 치안이나 범죄 문제를 직접 다룰 수 있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나 정부가 보다 효과적인 사회 안전망을 구축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내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사회의 도덕적인 윤리와 법은 초등학교 1~2학년 때 거의 다 배우는 것”이라며 “일본의 경우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사회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철저하게 교육시킨다. 한국사회도 이와 같은 인성교육을 저학년 때부터 반드시 실시할 수 있도록 교회가 인성교육 기관으로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이어 “한국 교회는 정신건강이나 품행을 위한 예방대책위원회를 만들 필요가 있다”며 “목회자와 성도들은 정신건강에 예민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목회자는 성도들의 정신건강을 유심히 살피고, 사회 안에서 교사나 공무원 등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성도들의 경우 동료들의 행동이 정상적이지 않다면 그들을 보호하거나 치료하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상억 교수는 “한국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교회 안에서 ‘묻지마 신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대형화를 막지 못하더라도 작은 교회, 소그룹 공동체를 지향하면서 교인들 상호간 관계를 증진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을 실시해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사회 부적응자, 반사회적 성향을 가진 사람, 소외계층을 찾아내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은 한계가 있다”며 “시나 군 안에 설치돼 있는 건강관리상담센터, 다문화센터 등에 인적, 물적자원을 지원하면서 사회적 범죄를 예방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아브라함 이야기 (17)-2




17. 인간적 대안의 결과 / 창 16:1-6 (하)



아브람의 반응아무리 사래가 이성과 논리를 앞세운 그럴듯한 인간적인 대안을 제시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언약을 받은 아브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야 됨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 말없이 사래의 말을 따릅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창 16:2). 다시 말하면,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대처하면서 그 주도권을 사래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여기서 ‘들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잇쉬마아’로 문자적인 뜻은 ‘그 목소리를 듣다’ 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사래의 목소리를 듣고 그 말에 순종했다는 의미입니다. 왜 아브람은 사래의 말에 따랐습니까? 그것은 막연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래의 제안이 훨씬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래의 말을 따르면, 자손의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문제의 시작사래의 제안을 받아들인 아브람은 사래가 이집트 여인 하갈을 데려다 주었을 때, 그녀와 동침하여 드디어 기다리던 임신 소식을 듣게 됩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창 16:4). 하갈의 임신 소식은 사래의 인간적인 대안이 성공한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임신 때문에, 그의 가정에 다른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즉, 하갈이 사래를 멸시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창 16:4). 여기서 ‘멸시하다’라는 말은 ‘테칼 베에이네이하’로 그 뜻은 ‘그녀의 눈들로 (그녀의 여주인을) 가볍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하갈이 여주인 사래를 ‘깔보았다’ 혹은 ‘얕잡아 보았다’는 뜻입니다. 이 일로 사래는 분노하면서, 이번에도 주도권을 쥐고 아브람을 원망을 합니다: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창 16:5). 그런데 이 문장을 문자적으로는 번역하면 ‘나의 폭력이 당신 위에’라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내가 받는 모욕”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하마쉬’로 그 뜻은 ‘나의 (내가 받은) 폭력’ 혹은 ‘나의 (내가 받은) 부당함’인데, 이 단어가 창 6:11, 13절에서는 “포악함”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래가 하갈의 자만심을 얼마나 못 견뎌 했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래는 창 16:5 끝에서 거의 저주와 같은 말을 합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브람의 우유부단
하갈을 취한 사건 때문에 가정에 분란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너무도 무책임하게 화가 난 사래만을 달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창 16:6). 그 결과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고 하갈은 그 학대를 당하다 견디지 못하고 도망을 하게 됩니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창 16:6).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인간적인 대안을 선택한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평화롭던 가정에 평지풍파가 일어나 여주인과 종이 미워하고 반목하다가, 결국 하갈은 임신을 한 채 광야로 도망가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파괴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마저도 위태롭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은 가나안에 기근이 왔을 때에, 자신의 생각대로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문제가 더 복잡해지는 경험을 이미 했었습니다. 그러한 신앙경험들을 통해 그의 믿음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었지만 아직 온전한 신앙이 아니었기 때문에 또 다시 그럴듯해 보이는 인간적인 대안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사건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인간적인 대안이 해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막연하게 보여도 하나님의 말씀만이 정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인내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도합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