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9일 금요일

“통일은 우리 손으로...”



“통일은 우리 손으로...”


푸른나무 아더 킨슬러/신영순 선교사부부 밴쿠버 방문





푸른나무 코리아(이사장 곽수광 목사)의 신영순 선교사 부부가 밴쿠버를 찾았다. 푸른나무 캐나다 본부의 발대식 등을 협의하기 위함이었다.

“남한의 교회들이 북한에서 마음껏 자유로이 사역하기 전까지 이 일을 해나가려고 해요.”

신영순 선교사는 통일이되는 순간까지 북한의 고아들과 장애인들을 보살필 것이라며 해외에 흩어져있는 한인 디아스포라들의 힘이 하나로 뭉쳐야 함을 강조했다.

“남과 북의 정치적인 긴장고조로 대북지원이 다소 어려웠으나 해외 기관과 동포들의 따스한 손길을 통해 끊이지 않고 북쪽에 후원물품을 지원했고, 북한의 장애인 보호연맹과 협의해 북한에 있는 장애인의 복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지난 런던 장애인 올림픽에 북한의 선수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면서 “푸른나무는 장애인과 고아들을 지원하는, 남한 내 유일한 전문 단체”라고 소개했다.

특별히 푸른나무 코리아는 북한 당국으로부터 북한 전역의 43개 고아원을 위임 받아 지원하고 있으며 각 교회는 재정 형편에 맞추어 이 고아원을 입양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또 고아원 뿐만 아니라 농아학교 8개소와 맹아학교 3개소 등 11개 장애인 특수학교와 자매 결연을 맺고 이들을 후원할 후원자들을 모집하고 있다.

푸른나무 신영순 선교사는 매년 6회 이상의 방북을 통해 물품 지원은 물론, 지원된 물품의 전용 유무 또한 확인한다며 “각 교회에서 지원한 물품에 대해서는 북측으로부터 정확한 수량이 기재된 확인서를 발급받아 후원교회에 전달한다”고 말했다.

푸른나무 캐나다 본부는 지난 9월 연방정부로부터 세금공제 영수증 발급을 위한 법적 조치를 끝내고 소수의 발기인들이 기도로 준비해왔으며 내년 초에 발대식을 갖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갈 예정으로 있다.

한편, 신영순 선교사의 남편 아더 킨슬러 선교사는 1934년 평양 출생으로 1972년부터 37년간 미국장로교 선교사로 파송돼 산업선교와 장애인선교 등 다양한 사역을 펼쳤으며 2004년 부인 신영순 선교사와 함께 사단법인 등대복지회를 설립, 북한동포를 위한 사역을 시작한 바 있다. 현재는 은퇴 후 신영순 선교사의 푸른나무 사역을 지원하고 있다. [문의: 크리스쳔신문]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15 >





0073. “출(出)유럽기”
십자군 원정으로부터 로마교황청이 조작하여 12년 동안 프랑스를 양분(兩分)시킨 ‘드레퓌스’사건에 이르기까지, 로마교회의 아들들 - 무쏠리니, 히틀러, 조국 프랑스를 로마카톨릭교회를 통해 나치에 매도한 빼땅(P. Petain)정권, ‘계통적인 카톨릭적 민주주의’를 외친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 나치의 꼭두각시 파벨릭(Ante Pavelic) - 은 모두 그 뿌리를 로마에 두고 로마카톨릭교회 안에 잠복해 온 로마제국의 ‘새질서’(New Order)를 위해 동원되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이란 혼란한 기간을 틈타 전 유럽의 유대인들은 노후한 선박들을 대절 또는 구입, 겨울철을 이용하여 옛 고토 이스라엘 땅으로 밀입국을 강행하였다. 그들에겐 이스라엘의 독립의 가능성은 요원한 일로 여겨졌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불러모으사 선지자 요나에게 하셨던대로 이스라엘의 해안에 쏟아내고 계셨다.

 
0074. 『종교다원주의』를 인정하고 있는 회칠당한 기독교회사
대부분의 신학교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회칠당한’ 교회사로 세뇌된 지도자들로 인하여 한국교회에는 아직도 ‘요한계시록’이나 ‘다니엘서’가 닫혀진 책으로 남아있다. 앞으로 더 자세히 다룰 수 있게 되기를 바라지만 독자는 이 지면을 통해 이미 나간, 또 계속될 교회사의 이야기를 착실히 공부하여 배도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길 바란다. 많은 분들의 글을 보면 마치 기독교안에 천주교, 동방교, 프로테스탄트(개신교? - ‘개신’을 믿다니...?)가 있다는 식의 논조가 대부분이다. 개혁자 깔뱅(Jean Calvin, 1509-64) 이 쓴 책은 ‘기독교강요’이지 ‘개신교강요’가 아니다. ‘천주교’란 용어에 대응하는 단어는 개신교가 아니라 ‘기독교’임을 명심하시기를 바란다. 기독교와 동방교, 천주교는 ‘삼위일체’교리, 십계명, ‘예수님의 가계보’등이 완전히 다르다.
예를 들면, 신약성경의 7군데에서 “예수님의 형제자매들” 이야기가 나온다(마12:46/막3:31/막6:3/요2:12/요7:10/행1:14/갈1:19). 그러나 동방교에서는 요셉이 마리아와 재혼(?)하기 전 ‘그의 전처가 낳은’ 형제자매들로, 천주교에서는 예수님의 ‘사촌들로’ 가르친다. 여러분의 이웃교회에서 누가 이렇게 가르친다면 당장 이단시비내지 손가락질을 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동방교, 천주교에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고 하면 다들 점잖아(?) 진다. 그리고는 이것은 동방교 또는 천주교의 견해(?)라고 소개하고는 얼버무린다. 당근은 어디를 잘라도 당근이듯이 이단은 이단이다. ‘완전히 다른’것을 포용하고 있으니 ‘종교다원주의’를 통한 배도가 유행병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바라옵기는 ‘개신교’니 ‘신교-구교’니 하는 거짓된 용어를 하루 속히 버리시길...
0075. 태양신 숭배자 『콘스탄틴』대제
AD 325년 콘스탄틴 황제는 니케아 공회(오늘날의 터키)를 주관하였고, 동방에 ‘새 로마’건설계획을 세웠다. 비잔틴은 로마니아(Romania, the land of Roum)로 불렀다. ‘새 로마’는 ‘옛 로마’의 끝을 의미했음으로 시기에 찬 로마의 종교지도자들은 미리 로마교회의 우위성을 주장할 음모를 꾸몄다. 정치적 경쟁은 불가피하였고 두 로마 사이에 평화가 유지된 적은 결코 없었다. 동(東) 로마와 서(西) 로마로 불려진 두 로마 간의 암투는 계속되었고, 정치적 열세에 몰린 서 로마는 ‘위대한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로마를 내세우고 제국의 황제 위에 군림하려 하였다. 니케아 공회가 끝난 후 로마의 지도자들은 니케아 공회는 로마 교회가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됨을 결정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문서까지 변조시켰다. 즉 로마 교회의 결정이 ‘최종적’이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성경교리(敎理)나 예배의식 같은 것은 콘스탄틴에게는 아무런 흥미거리가 되지 않았다. AD 325년, 리시니우스(Licinius)를 패배시킨 후에 동방의 영토에 사는 국민들에게 보낸 공문에 의하면, 기독교는 단순히 일상생활을 규정한 법률이었다. 콘스탄틴은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공적으로 선포한 적도 없었다. 313년 트리에(Trier)에서 있은 승전기념식사(式辭)에서도 황제의 수호신(神)은 언급되지 않았다. 콘스탄틴의 개선문(Arch of Constantine)에도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승리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313년 이후 기독교안에 들어온 이교도들은 콘스탄틴 황제의 허락 하에 로마의 운송수단을 이용, 그 당시 이교도들의 중심적인 순례지였던 애굽에 있는 ‘제왕(諸王)들의 무덤의 계곡’을 순례하였다. 콘스탄틴 가문의 전통적 예배는 ‘불멸의 태양신’(Sol Invictus/the Invincible Sun God) 숭배로서, 콘스탄틴 황제는 여전히 태양신 숭배자였다. 312년 이후에도 이 태양신이 콘스탄틴의 동전에 6-7년이 지나도록 나타나고 있음은 놀라운 일이다. 로마제국은 수세기에 걸쳐 이교의 전통 위에 서 있었으며, 동방의 태양(Sol Oriens/Sun-of-the-East)은 황제와 부황제의 수호신이었다.
 
 
 사진설명
(1), (2) 이스라엘의 해안으로 밀입국하는 유대인들.
(3) 1984년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방한을 기하여 한국의 천주교가 서울의 여의도광장에 세운 앙크모양의 스탠드. 십자가 앞의 ‘피라미드’형의 지붕과 대형 ‘앙크’(Anch) 형의 스탠드에 세워진 십자가는 로마종교의 근원이 바벨론임을 저들 스스로가 드러내고 있다. 로마교황 문장의 M은 마리아를 의미한다.
(4) 애굽의 피라미드에 새겨진 바벨론 종교의 심볼인 ‘앙크’벽화는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과 겨루기를 시작하였던 고대 바벨론. 또 다른 영적 바벨론인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피신하였다가 나온 애굽, 성령운동을 빙자 콘스탄틴 대제의 에큐메니즘(종교통합) 운동을 재현, 세계정부운동을 추진하고 있는 로마로 흘러들어왔다.
(5) 천주교회의 제단 위에 놓여진 앙크.
(6) 목걸이 앙크.



0076. “이 표적으로 정복하라!”

“이 표적으로 정복하라!”라는 음성과 함께 보았다는 표적은 십자가가 아닌 애굽 신(神)의 심벌인 ‘앙크’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까지 로마카톨릭교회의 제단에 놓여져 있다. 십자가는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의 상징이지, 땅 위의 전쟁을 보장하는 부적이 아니다.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그는 막시밀리안 황제의 딸이며, 그의 두 번째 왕비였던 파우스타를 처형하였고, 그의 세 아들은 권력쟁탈전에서 막내는 맏형을 죽였고 나중에는 둘째만 남게된다. 콘트탄틴 황제가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이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까닭은, ‘그가 기독교를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믿었던 것을 기독교라 불렀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이데올로기의 위력’을 나타내고 있다. 임종의 콘스탄틴 황제는 가룟 유다 처럼 후회하고 있었다. 세상권력을 가지고 로마 교회와 한 흥정을 가슴아프게 생각하고 있었다. “칼은 안돼!...칼은 안돼!...지식이야!” 그가 로마 교회에 주고 간 마지막 말이었다.
0077. ‘교황권의 로마’로 탈바꿈한 ‘이교의 로마’
AD 337년 콘스탄틴 황제가 죽고,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에큐메니칼 공회가 다시 열렸을 때도, 역시 제자들의 ‘누가 크냐?’하는 다툼이 고상한(?) 종교적 탐욕의 언어로 옷입고 노출되었다. 니케아 공회가 있은지 1세기가 지난, AD418 년 칼타고에서 있은 공회에서 로마교회 지도자들은 저들의 선배들이 위조한 니케아 공회의 문서에 의거, 로마교회의 최종적 결정권을 들고 나왔다. 로마를 제외한 다른 곳에서 온 지도자들은 이 사실에 크게 놀랐고,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플에 사람을 보내어 니케아공회가 결정한 문서의 사본을 가져오도록 하였고, 그들은 곧 로마교회가 문서를 위조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음모와 더불어 로마교회는 세상권력을 쌓아 올렸고, 로마제국의 수도를 서방의 로마에서, 동방의 콘스탄티노플로 옮김으로써 생겨난, 서방 로마제국이 누렸던 권력의 빈자리를 엿보기 시작하였다. 로마는 여전히 서방의 중심지로 남아있었다. 로마 감독은 가이사 자리를 대신하여 서방세계에서 가장 세력있는 정치적, 종교적 수뇌가 될 꿈을 꾸었다. 사단은 그들의 오장육부에 땅에 속한 썩어질 세상영광을 힘껏 불어 넣었다. ‘이교의 로마’(Pagan Rome)는 ‘교황권의 로마’ (Papal Rome)로 탈바꿈을 하였다.
 
바다들아 외쳐라 예수 구원하신다
모든 죄인 나오라 예수 구원하신다
모든 섬아 일어나 메아리쳐 울려라
복음 중의 복음은 예수 구원하신다
(찬송가 252 / 기쁜 소리 들리니 ②)
구영재 선교사 [KOO,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정성헌 선교사 선교칼럼 (39)



죽다가 살아나다



부산 수영로교회에 도착한 나는 선교대회 기간 동안 졸지에 예기치 않던 스팥 라이트를 받게 되었다. 선교대회가 끝난 후에도 정필도목사님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선교사 세 가정을 데리고 삼 일 동안 틈틈이 특강을 하시면서 위로와 격려를 주셨다. 선교담당목사에게 나의 처한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으나 그 때 까지는 어떤 결정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기도하자고 했다.
아내의 몸이 힘들었지만 교단파송을 받기 위해서는 일 년에 한 번 밖에 없는 선교사훈련을 먼저 마쳐야 했기에 수술은 뒤로 미루어 놓았다. 훈련을 마치고 병원을 찾았을 때는 7월 중순이 되었다.

선교사들에게 특혜가 있는 병원을 수소문해 김포공항 근처에 있는 서안복음병원을 찾아갔다. 각종 검사를 마치고 수술 날짜를 잡았다. 자궁에 있는 큰 근종과 상태가 좋지 않은 왼쪽 나팔관을 제거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내의 수술을 시작하기 전 나를 불러 의사선생님들과 간호사분들이 함께 손을 잡고 기도를 했다. 나는 수술시간 내내 교회로 가서 착잡한 심정으로 기도를 했다. 수술은 잘 끝났고 두 주 정도 입원하여 회복을 기다려야 했다. 아내는 더운 날씨에 수술부위가 잘 아물지 않아 고생을 했지만 수술 시에 경험했던 은혜로 잘 견디었다. 아내가 전신 마취중에도 의식이 살아 의사와 간호사들의 수술의 모든 과정이 예배로 하나님께 올라가 것을 보았다고 간증을 했다.

퇴원 날이 가까워 지면서 병원비를 마련을 위해 기도하면 마이너스 통장부터 통장잔고를 다 찾아 모았다. 예상한 병원비 보다 몇 만원이 많았다. 퇴원 후 그래도 빨리 회복되도록 몸에 좋다는 음식 한 그릇은 사 먹이고 처가로 데려 갈 수 있겠다 싶었다. 친구가 섬기던 개척교회에서 오래된 차를 빌려 병원으로 향했으나 무슨 일지 몇 분이 안되어 에어컨이 고장이 나더니 차는 삼복 더위에 찜통으로 변하고 말았다.

우리는 짐을 챙겨 퇴원수속을 밟기 위해 수부로 갔다. 아내는 천천히 걸어서 약국 앞 대기석에 앉아 있었다. 청구서를 받아 든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913,000원. 예상했던 금액보다 오만 몇 천원이 더 나온 것이다. 나는 의아해서 물었다. 직원은 수술비 전체 금액 중 반은 할인해 주었지만 아내가 맞은 무통주사는 할인이 되지 않아 그 금액이라는 것이다.

나는 청구서를 들고 아내의 눈을 피하여 화장실로 갔다. 지갑을 열어 뒤지고는 가지고 온 돈을 세고 또 세었다. 모두 903,000원. 만원이 모자랐다. 뒤지고 뒤졌으나 다른 돈은 없었다. 당황스럽고 견딜 수 없는 비참한 생각이 일기 시작했다. 나는 아내의 눈을 피해 ATM기계로 가서 기적을 바라는 마음으로 현금카드를 넣었다. 예금인출 키를 눌렀으나 나온 영수증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잔고 3300원. 만원 이하는 인출할 없습니다.” 나는 거의 패닉 상태가 되고 있었다.

수부에 갔던 내가 불안한 모습으로 안절부절 돌아다니자 아내는 핏기 없는 얼굴로 애써 웃어 보이면서 “여보, 우리 언제가요?”라고 한다. 나는 무너지고 있었다. 단순히 돈 만원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다음에 갔다 준다고 하고 퇴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와 하나님과 관계의 문제였다. 아무리 틀어 막으려 해도 한 쪽 구석에선 이런 생각이 밀고 올라왔다.
“그래, 이건 저주를 받지 않고서는 있을 수는 없는 일이야. 땅끝까지 순종해 간 너희가 파송교회에서도 짤렸지, 이제 만원이 없어 이렇게 붙들려 있잖아. 너희 집 오 남매, 처가 구 남매 중 누구 하나 이 절박한 순간에 너희에게 관심을 기울이니? 너희는 하나님의 눈 밖에 났어!”
나는 속으로 울분을 터뜨리고 있었다.
“하나님. 제가 열 여덟 살 주님을 영접하고 지금까지 주님이 하라고 하신 것은 다 했잖습니까? 선교사되라고 해서 신학교 갔고, 신학교 입학하자마자 합동교단 속한 날 통합측에 교육전도사로 보내실 때도 갔고, 덕유산 중턱 무교회촌에 개척하라고 하실 때도 갔고, 다시 땅 끝 카라칼팍스탄까지 갔잖아요. 완전한 순종은 못했지만 할 만큼은 했잖아요. 저도 타락한 종들 많이 보았습니다. 오늘 이 상황이 되고 보니 그들이 왜 돈 때문에 타락했는지 알겠습니다. 주님, 지금 이 시간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으면 더 이상은 저의 중심과 진정성을 드릴 수 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목사의 옷을 벗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 쪽에서 올라는 다른 애절한 마음의 생각이 있었다.
“시험이다. 견뎌야 한다. 시험이란다. 넘어야 산단다”
나는 두 사이에 끼인채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 몇 분이 영겁과 같았다.

아내는 내게 무슨 일이 있냐고, 왜 안가냐고 물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병원비 만원이 모자란다고 대답했다. 이 말에 아내는 꼭 꺼진 풍선에 마지막 바람이 빠지듯 목을 떨구며 주저 앉아버렸다. 시간이 멈춘 듯 했다. 내 마음엔 “아, 이것이 죽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내게 다시 말을 걸었다. “여보, 그 지갑 좀 다시 보세요.” “응, 몇 번을 봤어!” 몇 분이 지나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다시 지갑을 보라고 했다. 나는 곤욕스럽고 고통스러워 지갑을 꺼내 들고는 아내를 향해 까발리듯 펼치며 “봐, 없잖아!”라고 하며 손을 집어 넣었다. 그런데 왠 일인가! 오른 손 중지 끝에 만원 짜리 신권지폐 하나가 딸려 나오는 것이었다. 주님이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이다. 산 것이다. 나는 시험이었음을 그제야 알아 차렸다. 눈물을 흘리며 남은 삶에 마지막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까지도 주님을 위해 드릴 것을 마음으로 서원했다. 나는 수부로 가서 그 만원을 더해 병원비를 지급하고 집으로 향했다. 중복 날씨에 차는 찜통이었지만 내 마음엔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회복을 기다리는 아내와 아이들을 한국에 두고 다시 선교지로 돌아가야 했다. 파송교회가 나서질 않지만 현장에서 기다리는 성도들을 생각하니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재정적으로 아무 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다. 기도하는데 권사님 한 분이 전화를 하셔 나를 찾으셨다. 나의 사정을 다 아신 권사님이 파송교회가 나설 때까지 후원을 하시겠다며 매월 얼마가 필요하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권사님도 잘 아는 친구 목사가 개척교회라 어렵지만 일부를 부담하기로 했으니 남은 금액을 감당하시면 좋겠다고 말씀 드렸다. 그 권사님은 항공비와 생활비라며 헌금을 건네셨다. 그리고 아무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사역하라고 위로해 주셨다.

항공권을 구입하고 후원하기로 한 친구에게 내일 출발한다고 전화를 했다. 친구 목사는 출발 전에 새벽기도를 인도하고 가라고 요청을 했다. 새벽기도 후 아침을 먹으러 가자며 지갑을 찾는다고 서랍을 열더니 탄성을 질렀다.
“정목사, 사모님 수술비 어떻게 됐어? 야, 내 정신 좀 봐라! 우리교회에서 사모님 수술비를 하라고 헌금을 해서 내게 전달했는데 서랍에 넣어두고 깜깜하게 잊어버렸네!”
나는 “야, 인생아! 잊어버릴 것을 잊어버려야지 그걸 잊어버리냐!” 농담 삼아 한 마디 했지만 있었던 일을 설명하자 친구 목사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
 
 
 
 
 

사망에서 생명으로 (3)



4. 세상의 자유인에서 하나님 나라의 자유인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번 주간에도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사랑이 밴쿠버 그리스도인 여러분에게 부어지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삶을 사는 우리 모두 하나님께,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 빚을 감당하는 거룩한 마음과 자세로 이번 주간도 삶의 현장에 나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호에서 나누었던 것처럼 저는 중국에서 돈이 주는 쾌감과 행복(?)함을 맛보는 동시에 마음 한켠에서 어찌할 수 없는 공허함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열심히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성공의 기준으로 되어버린 자본주의 체제에 익숙해진 중국에서의 삶은 주님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내재해있던 본능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돈을 많이 버는 것이 결코 사람의 어떤 기준치 또는 만족감을 완벽하게 채워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돈을 버는 것의 끝은 어디일까?’라고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기도 했지만 그 끝이 없음을 발견하면서 마음 한켠이 구멍 뚫린 것 같이 휑하고 허탈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중국 공안당국에 체포되어 3년간 떠나있던 고향땅을 다시 밟게 되었고 3년간 놀랍게 변한 북한의 눈부신 시장경제의 발전을 보면서 다시금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해야 한다’는 세상적 성공기준에 마음을 뺏겼습니다. 돈을 버는 것의 끝이 없음을 깨닫기도 했지만 마음중심에 모시지 못한 하나님의 부재는 다시금 사람이 성공하는 길은 오직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속삭였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마음을 잘 아셨기에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두 주인(마 6:24)에 비유하시고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신 것은 아닐까요?

그런 깨달음과 함께 재탈북하여 한국행을 준비하면서 마음에 굳힌 세 가지 다짐, 그 다짐은 한국으로 들어오기 전 태국에서 만난 하나님으로 인해 부서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두 번의 한국행이 실패로 돌아가고 세 번째 한국행을 방콕의 어느 한인교회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간섭하심은 드디어 어느날 새벽기도시간에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내가 살아온 삶을 하나의 필름으로 순식간에 보여주시는데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깨달아지고 믿어지는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고 저는 무릎을 꿇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울고 또 울었는지, 제 인생에서의 가장 아름다운 첫 상봉은 그렇게 새벽시간에 홀로 교회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때 중얼거리듯이 고백했습니다.
“아, 하나님! 나는 몰랐지만 나를 잘 알고계시는 하나님께서 내가 믿지 않았던 북한에서부터, 아니 태초부터 나의 삶을 인도해오셨군요. 내 인생가운데 하나님은 늘 함께 계셨군요...”

그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을 때 저는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그 분과의 소통가운데서만 발견할 수 있는 놀라운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는 참 자유의 세상이 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자유가 얼마나 인생을 옭아매는 올가미의 구조인지, 하나님나라의 자유가 얼마나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측량못할 자유의 세계인지 맛보기 시작한 것이죠.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사실이 왜 그리도 놀랍고 감격스러운지, 그리고 내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을 얻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감사해서 매일매일 행복의 도가니에 휩싸여 태국에서의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자유인으로 신분탈환을 한 저는 주님을 만난 그날 새벽에 분명하고도 또렷한 주님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계속>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
 
 
 
 
 

교회음악Plus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은...

먼저 많은 기도로 준비하여야 하리라.
기도가 없는 찬양과 인도는, 함께 하는 사람들, 성도들을 더 힘들게 한다. 기도로 준비하여 찬양을 인도하면, 함께하는 성도들의 형편과 필요를 헤아리고, 때에 맞는, 의미에 맞는 곡들을 선곡하게 되며,
찬송을 통하여 성도들을 기도의 자리로 인도하며, 믿음의 길로, 깊이를 더하게 될 것이다.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은 노래만 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여야 한다.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은, 함께 찬양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곡을 나눌 수 있도록 기도하며, 준비하여야 한다. 마치, 좋은 요리사처럼, 좋은 메뉴를 선택할 수 있도록 좋은 재료로 엄선하여, 정성을 다해 준비하여
음식을 대하는 사람들이 기쁨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처럼. 좋은 곡들을 엄선하여 준비하여야 한다.
또, 음식을 나르고, 써빙하는 웨이터나 웨이추레스처럼 음식을 기분 좋게 제공하며, 식사를 잘 할 수 있도록 그리고 식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사람처럼 찬양하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면서 여러 가지 음악적인 필요들을 채워주어야 한다.
찬양 인도자는 절대로 그 시간에 자신이 중심이 되어, 군림(대장처럼)하여서는 아니 된다. 마치 좋은 여행 가이드처럼, 자신이 가이드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듯 없는 듯 하면서, 자신이 먼저 경험한 내용과 지식을 바르게 전해 주어서, 여행자들이 그 곳에서 좋은 것들을 보고,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처럼 철저하게 곡들을 이해하고, 영적인 기쁨과 감정을 경험하고, 확실하고 바르게 인도하여야 한다.
홍동근 / 목사, Music Mini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