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30일 목요일

한중수교 20년




"중국 선교에 긍정적 영향 끼쳤다"



대한민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은 지 20년이 지났다. 그간 중국의 경제는 급속도로 성장했고, 우리 주변에서 ‘Made in China’가 적힌 제품을 찾는 일은 식은 죽 먹기가 됐다. 한중수교 20주년을 기해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수교당시 64억 달러였던 교역액은 2011년 기준 2200억 달러로 34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은 이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됐다. 물론 대한민국도 경제권 10위의 쾌거를 이뤘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이야기할 때 떼려야 뗄 수 없는 나라 중국. 함께 성장해온 두 나라의 수교 20주년을 맞이해 한중수교가 선교에 미친 영향과 현황을 분석해본다.

# 중국을 향하여한국전쟁 당시 중국은 북한을 지원했다. 한없이 밀려 내려오던 중공군. 이런 중국과 우리나라는 좋은 관계일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수교이전에는 우리 국민들의 자유로운 중국 왕래가 어려웠다. 연변에 가족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통행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러던 1992년 한중수교를 계기로 중국의 문은 조금씩 열려갔다.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중국으로 향하는 학생들의 숫자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미리 중국어를 배워두자는 것이었다. 이에 발맞춰 크리스천들의 중국 진출 또한 눈에 띄게 증가했다.

중국선교연구원 인보라 선교사는 “한국이 중국 선교를 하는데 있어 한중수교는 커다란 역할을 했다”며 “먼저 선교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기회가 주어졌을 때 열심히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의 헌신이 지금의 중국 교회를 있게 한 장본인”이라며 “그들이 중국에 교회가 세워지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실질적으로 중국내 기독교인의 숫자가 20년 전보다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임희국 교수는 ‘한ㆍ중 수교20년, 성찰과 조망’이라는 논문을 통해 “약 20년 전에는 중국 기독교인의 숫자가 1천만 명에서 그친데 비해 지금은 1억 6천만 명 내외로 알려져 있다”며 중국에서 기독교가 그야말로 급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또한 “20세기 중반까지는 세계 기독교의 중심이 유럽과 북미였는데, 이제는 그 중심축을 더 이상 그곳에서 찾을 수 없게 됐다”며 “반면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등에서 신생교회들이 활발하게 자라나고 있다. 특별히 중국이 그러하다”고 밝혔다. 현재 중국 기독교가 성장하는 추세를 봤을 때 선교에 있어서도 중국이 어느 정도의 몫을 감당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 교회는 현지에 교회가 세워지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눈을 돌려 세계에 복음을 전할 준비에 여념이 없다.

# 남겨진 문제들사실 한중수교 20주년이라는 중요행사를 두고 양국은 관계를 개선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까지 두 나라는 ‘불편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과거 고구려 역사왜곡, 서해안 불법 조업 등 양국 사이에는 묵은 체증이 있었다. 또한 최근 탈북자 강제북송 사태, 북한인권운동가 김영환 씨에 대한 고문의혹 등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두 나라의 관계는 경색되어 있었다. 그리고 위에서 제기한 문제점들은 지금까지도 ‘미해결 과제’로 남았다.

이런 국제적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중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한국인을 향한 중국내 시선이 부정적으로 변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그들이 타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 탈북자 강제북송으로 국내 여론이 들끓고 있을 때 중국 공안당국은 중국내 선교사들에게 “1~2주일 안에 중국을 떠나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또한 최근 탈북자 구호사역에 나섰던 전재귀 선교사는 중국 공안에 억류돼 옥고를 치렀다. 일각에서는 “공안에 탈북자를 데리고 있는 선교사를 신고하면 포상금을 받을 수 있는 것 같다”며 “돈 때문에 자신을 돌보던 선교사를 공안에 신고하는 일도 있었다”고 밝혔다. 이렇듯 중국내에서 한국인 선교사들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과 수교한 후 단교한 대만과의 관계에도 회복이 필요하다. 더욱 큰 것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로인해 대만 국민들의 반한감정은 클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만을 품은 한국 선교사들은 어려움이 더욱 커졌다.

# 나아갈 방향OMF 손창남 선교사는 “어느 곳에 파송된 선교사든지 선교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며 가장 기본적인 것에 충실할 것을 강조했다. 손 선교사는 “인권도 중요하고 불합리한 문제들이 잘못됐다고 지적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지만 그런 혈기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주객이 전도될 수 있으니 유의하라는 것이다. 그는 “한국에 들어온 제3국의 사람이 우리나라가 지향하는 것과 반대되는 일을 주장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이냐”며 “중국에서 지향하는 문제들이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그 곳에서 선교하기 위해서는 인정해야할 때도 있다”고 주장했다.

인보라 선교사 또한 중국 선교 시 주의해줄 것을 요청했다. 인 선교사는 “중국 정부는 중국이 하나가 되길 원하는 마음이 크다”며 “떨어져 나가기 원하는 티베트, 신장, 조선족 등 중국 정부가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상황에 있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또한 “중국 공안당국이 이미 중국에 있는 한인교회는 물론 선교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며 중국 정부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들을 삼가줄 것을 요청했다.

많은 문제들이 산재한 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돼야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 교회는 중국 선교에 있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인보라 선교사는 “많은 선교사들이 중국 선교에 나설 때 무언가 가르치러 가는 것 같다”며 “사실 기독교는 중국에 먼저 전해졌다. 그들에게 무언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섬기러 가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진정성에 대한 조언도 이어졌다. 인 선교사는 “중국 공안들도 진심으로 섬기려는 것은 모두 느낀다”며 “조금만 관계가 이뤄지면 그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먼저 그들에게 신임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 그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할 경우 선교가 더욱 힘들어질 수도 있다”고 염려했다.

한편, 손창남 선교사는 “중국인들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의 입장에서 도움이 될 존재라면 쫓아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손 선교사는 “150년 전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을 선교할 때도 중국인들은 선교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가 그들에게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에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그렇게 그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 섬기다 보면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드러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중국 선교 전문가들은 한국적 선교와 신앙을 강요해선 안 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손 선교사는 “중국문화 안에서 신학이 재정립돼 그들만의 신학이 생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인보라 선교사 또한 “중국의 문화를 무시하고 우리의 문화를 내비치기보다는 그들의 문화를 먼저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며 “어려운 상황에서 불씨에 불이 붙어 타오르기 시작한 중국 선교가 이제는 서양에 영향을 끼쳐 그들의 꺼진 불꽃에 다시 불을 붙여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성경 200독 완수, 황현성 장로



"성경을 통해 받은 은혜로 주께 영광 돌린다”


1997년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해 최근 성경 200독을 완수한 황현성 장로(수원 성림교회). 황 장로는 “읽을수록 말씀이 깨달아지고 쉬워지는데 왜 진작 안 읽었나 후회된다”며 “성경을 통해 받은 은혜에 감사해 주께 영광을 돌린다”고 전했다.

본지 창간독자이기도 한 황 장로는 “1997년 전만 해도 내게 성경은 휴대품에 머물러 있었다”며 “성경이 생명책인 줄 알면서도 인생의 고민이나 영적 갈등이 있을 때조차 성경을 찾지 않았던 사람이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는 1997년부터 굳은 각오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2007년엔 30독, 2011년 4월엔 80독, 같은 해 7월엔 100독을 했고, 올해 2월 150독을 끝냈다. 황 장로는 “80독을 하고나니 속독법을 익혀 성경을 읽는데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며 “성경구절마다 밑줄을 긋지 않은 곳을 찾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또한 황 장로는 “한 종류의 성경만을 읽으니 지루한 감이 있어 쉬운 성경, 큰 글자 등으로 표제를 달아 출판된 다른 성경을 읽었는데, 오히려 전 성경에 비해 은혜가 되지 못했다”며 “한자용어는 한글로 풀어 일상용어로 바꿔 영성이 떨어지고, 어떤 성경은 주석인지 설교집인지 분별이 안 될 정도였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세계엔 언어별로 5천여 종의 성경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오는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이 중의 하나를 들여와 기독출판사와 제휴번역하면서 성경의 종류가 많아지고 있다”며 “주석이 많고 찬송가 또한 여러 종류가 되도 좋으나 예배용 성경은 하나로 통일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기독서적 편찬 회사들이 다른 성경과의 차별화를 위해 용어선택에 신중을 기하지 않고 속어도 서슴없이 사용함으로써 자의적 해석 또는 억지풀이가 나타나고 있다”며 “이러한 경향이 교회가 분리되고 세속화되어가는 효시가 아닌가 하는 염려도 된다”고 우려했다.

또한 황 장로는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우직하게 성경을 읽어나갈 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며 성경 읽는 것을 권면했다.

‘랑데뷰(RENDEZ-VOUS)’



2012 YWAM CANADA Conference
‘랑데뷰(RENDEZ-VOUS)’열렸다




지난 8월 19일부터 24일까지 2012년 YWAM CANADA Conference가 매니토바 주 위니펙에 있는 피나와에서 열렸다.

“New Season, Connection, Identity, Inspiration”이란 주제를 가지고 캐나다 YWAM 베이스가 있는 48개 지역에서 약 200명(어린이 포함)의 Full time 사역자들이 참석했다.

1999년 부터 시작된 YWAM CANADA Conference는 ‘랑데뷰(RENDEZ-VOUS)’로 불린다. 랑데뷰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의 만남’이란 뜻의 불어이다. 1800년대 초 캐나다 원주민(Frist nations people)과 프랑스 무역상인들이 물물교환을 위해 만났던 랑데뷰는 캐나다 건국의 초기 역사성을 가진다. 그러나 오늘날 YWAM CANADA의 랑데뷰는 영적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다양한 민족과 세대들이 각 문화를 뛰어넘어 화합하고 사역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민족 국가이고 Multicultural한 캐나다의 모습과 겹친다.

중보기도, 찬양, 나눔, 강의와 주제별 Workshop 그리고 여러 Community Activity를 통해 서로가 치유받고 격려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렸다. 또한 새로운 사역팀을 축복하고 간증하며 다음 랑데뷰를 기약하면서 은혜 가운데 2012 랑데뷰를 마쳤다.

[제공: YWAM CANADA NEXIA 글로리아 임]

아브라함 이야기



18. 하갈의 체험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 / 창 16:7-16 (상)



하나님의 약속이 지연되고 미래가 불투명해지자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 대신 그럴듯해 보이는 사래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하갈을 통해 후손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계획은 처음에는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곧 평화롭던 가정에 원망과 다툼이 생기더니 결국 임신한 하갈은 여주인 사래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도망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후에 일어난 사건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집트로 도망가는 하갈사래의 학대를 피해 사막 (광야)으로 도망친 하갈은 수르 (Shur)로 가는 길 옆에 있는 샘 (우물)에서 하나님의 천사를 만납니다. ‘수르’ (Shur)는 시내 (Sinai)산 북서쪽에 있는 이집트 바로 옆 광야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지금 하갈이 가나안에서 이집트로 가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즉, 하갈은 자신이 원래 나왔던 이집트로 도망을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갈을 만난 하나님의 천사이집트로 가던 하갈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천사는 그녀에게 질문을 합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8절 상). 처음 보는 낯선 이가 자신의 이름 뿐 아니라 자신의 여주인의 이름과 신분을 말할 때, 하갈은 크게 놀랬고 이 낯선 사람이 신적인 존재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하갈에게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봅니다. 이미 하갈의 이름은 물론 그녀의 신분까지 알고 있던 천사가 정말 몰라서 묻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하갈로 하여금 지금 현재 그녀가 처한 상황을 돌아보게 하신 것입니다. 똑같은 질문에 대해서 거짓말을 했던 가인 (창 4:9)과는 달리 그녀는 솔직하게 말합니다: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8절 하). 그러자 그 천사는 하갈에게 명령을 합니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9절). 이것은 하갈이 여전히 사래의 종이기 때문에 돌아가라는 냉혹하고 확고한 명령입니다. 특히 여기에 쓰인 ‘복종하라’는 말은 히브리어 동사 ‘아나’ (ʿānā)의 ‘히트파엘’ (Hitpael)형으로 그 뜻은 ‘시달리다’ 혹은 ‘비하하다’ 입니다. 이것은 하갈이 다시 사래에게로 돌아가 자신을 낮추고 사래에게 시달려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갈은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녀와 임신한 아이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갈에게 약속을 준 하나님의 천사
하갈에게 다시 여주인에게로 돌아가라 명령한 천사는 이번에는 그녀에게 약속을 줍니다: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0절). 이것은 아브람에게 하셨던 약속들 (창 12:2; 13:16; 15:5)과 똑같은 것으로 하갈의 자손이 아브람의 약속에 포함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그 천사는 하갈이 아들을 낳을 것이고 이스마엘이라고 이름 지으라고 말합니다: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1절). 여기서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은 직역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고통스러운 부르짖음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이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고통과 압제당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외면치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왜 하나님께서 하갈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고통당하는 하갈에게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은 비록 하갈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초점은 여전히 아브람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12절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예수님의 마음 치유



제 11 장 영의 치유와 혼의 치유


3. 영의 치유와 혼의 치유는 아주 다른 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과 이미 예수를 잘 믿고 있는 사람은 아주 다른 두 종류의 사람들이다. 믿지 않는 사람은 남의 식구, 즉 ‘외인’이고 믿는 사람은 우리 식구, 즉 내 자식, ‘내 형제’이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사람을 믿게 하는 것은 남의 자식을 감옥에서 꺼내오는 것이고 믿는 사람을 치유하고 성숙하게 하는 작업은 내 식구를 ‘양육’하는 사역인 것이다. 이것을 명심하며 구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이 두 그룹을 위한 말씀의 사역, 성령님의 사역, 또 회복의 사역에서 그 내용과 방법과 과정과 목적이 아주 달라야만 한다.

영의 ‘치유’와 영의 ‘성숙’
영의 치유와 영의 성숙은 또한 아주 다른 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혼동하고 있다. 이 혼동이 심각한 혼란을 불러 일으킨다. “영의 치유”가 가장 먼저 필요한 사람들이란 예수를 믿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영이 기절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깨어나게 해야 한다. 즉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오직 “거듭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기타의 무엇도 그들에게는 의미가 없다, 아니 오히려 해로운 경우가 많다. 일단 죽은 영혼을 살려야만 한다.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의 선포가 필요하고 성령님의 “기적”의 역사가 필요하다. 선교지에서 온갖 기적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기적의 역사 말이다. 그 다음으로 영의 치유가 필요한 사람은 어둠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다. 즉 악령을 섬기는 자들이고 다른 종교를 깊이 믿는 사람들이다. 회교도, 불교도, 또 사탄 숭배자 같은 사람들이다.
이에 비해서 “영의 성숙”은 거듭난 사람들이 말씀과 성령으로 양육 받으며 자라나는 과정을 의미한다.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치 어린이들이 해를 거듭하며 자라나는 과정과 같은 것이다.

혼의 치유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혼의 치유가 도움이 된다. 대인 관계가 좋아지고 가정이 평화로워진다. 그러나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혼의 치유가 예수님 앞에 나오는 과정을 오히려 지연시킬 수 있기에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으로 내적 치유를 심각하게 시도하지 않는다. 물론 주님께서 이미 예비하신 경우는 예외이지만.
예수님이 성경에서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셨다. 그런데 이 기적의 장면들을 주의 깊게 봐야한다. 각각의 기적이 ‘죽은 사람’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열두 제자들을 포함해서 이미 ‘살아난 사람’을 위한 것인지, 말이다.

잘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눈에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열두제자들도 그랬다. 그들이 비록 거듭났고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모든 것을 함께하며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예수님의 음성뿐이 아니라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듣고 만지며 말씀을 들었지만 그들은 “세상 남편”의 큰 영향아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조금 있으면 승천하실 상황에서도 이 땅에 “왕국”을 세우고 신나게 권세를 부리는 삶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행전 1: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제자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제자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기적이 아니었다. 기적을 보면 볼수록 그들의 세상을 향한 욕망은 더욱 커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 나도 저렇게 능력을 행사해서 사람들의 인기를 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육적인 마음이 자극을 받는다. 그 기적들은 제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주님께 나아오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였던 것이다.

제자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속사람의 변화”였다. 그들이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 예수님의 목표였다. 그들의 상하고 찢어진 마음을 치료해서 그들의 영으로 받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이 되게 만들어 가시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 훈련”이었던 것이다. 말씀을 통해서 영을 “성장”하게 하면서, 혼을 계속해서 “치유”해 가신 것이었다. 영의 치유가 아니라 “혼의 치유 작업”이었다. 혼이 치유되는 만큼 영이 성장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수준이 목회자라는 그릇의 수준을 넘을 수 없고, 성도의 인격 수준이 목회자의 인격 수준을 넘을 수 없다는 말을 음미해 보시라. 그릇이 수리되는 만큼 성령의 기름이 담겨지는 것이다.

구자형 목사(밴쿠버내적치유사역원장)saranghealin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