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7일 토요일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16 >






0078.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기독교회를 향한 유대인의 감정은 단순하지가 않다. 복잡하다못해 처절하다. 중세 로마카톨릭교회의 일곱 차례의 십자군 원정(역사가에 따라서는 여덟 차례로 보기도 함)은 유대인들에게는 또 다른 재앙이었다. 성지순례자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살육과 약탈을 일삼아온 로마교황청의 야욕을 그대로 표출한 역사였다.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십자군’(Crusade)이란 단어를 혐오하기 때문에 CCC (Campus Crusade for Christ)가 유럽대륙에 상륙하면 CC (Campus for Christ)로 바뀐다. ‘회칠당한’ 교회사에 속임당한 북미교회나 그 영향아래 있는 교회들이 아직도 십자군의 망령에 묶여있는 것이다. 로마교황청의 지원아래 천주교 ‘십자가’ 깃발 아래서 결단, 로마카톨릭교회의 아들 ‘나치’ 히틀러의 유럽침공과 600만이 넘는 유대인 살육을 감행한 ‘20세기 십자군 나치’ 역사를 통해 기독교를 보는 유대인들의 감정은 치유가 불가하다할 정도로 그 상처의 골이 깊다.

이스라엘에 가면 초등학교의 산수 교과서에는 만국 공통부호인 더하기(+)표가 없다. 십자가 모양이라 하여 ‘더하기표(⊥)’ 모양이 우리와 다르다. 숫자 4안에도 십자가 모양이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숫자 4는 변형된 모양( )이다. 국제 적십자 기관도 있으나 붉은 십자가 모양을 쓰지 않고, 청색의 ‘다윗의 별’( )로 대신하고 있다. 다윗의 별로 알려진 이 별은 유대인의 백과사전에 의하면 실제로는 다윗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임을 『히브리』대 교수들과의 만남에서 알게 되었고 전 세계 33개국이 넘는 국가에서도 발견되어지는 별이다. 헤르츨이 초안한 이스라엘의 국기는 ‘일곱 별’을 그린 것이 그의 스케치북에서 발견되었으나 이 다윗의 별은 유대교의 비교(秘敎) 카발라(Cabbala) 종교에 심취하였던 독일계 유대인 은행재벌 로스차일드(M. Rothschild, 1743-1812) 가문의 후손들에 의해 채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5년도 더 된 지나간 이야기이지만 ‘반(反)셈주의’ (Antisemiticism)란 주제로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과 ‘야드 바셈’(Yad Vashem)이 주관한 여름모임(Summer Session)에서 필자가 받은 교육은 건국 이스라엘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전세계에서 20여명이 선정된 모임이었는데 하루 7-8시간씩 강행된 강의가 거의 1개월간 계속되었다. 마사다(Masada)와 텔아비브의 ‘유대인 박물관’견학 외에는 예루살렘의 온 여름을 강의실에서 보냈다. 성지(聖地)의 이곳 저곳을 여행하게 되리란 계획과 기대는 포기한 상태였다. 여러 명의 『히브리』대 교수들의 강의 중점은 2000여년의 유대인들의 방황과 십자군, 나치의 대학살 등의 모든 불운을 기독교에 돌리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기독교와 천주교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필자의 지적으로 인해 시간마다 들어오는 유대인 교수들의 어색한 눈총을 받게 되었다. 미국 태생의 플로리다주(州)에서 온 젊은 유대인 ‘랍비’가 자기는 필자가 언급한 사실들은 다 이해하고 있다면서 교수들도 잘못 알 수 있지않겠냐고 반문하였다. 착하고 진실하게 보였던 그의 위로로 지루했던 1개월간의 강의를 견뎌낼 수 있었다.


중세 십자군 원정을 통해 예루살렘을 탈취하려던 로마교황청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저들은 그 야욕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천주교의 아들 히틀러의 다음 목표는 ‘예루살렘’이었으며, 그 당시에 이미 예루살렘에 세워질 로마교황청의 청사진이 완료되어 있었음을 『예루살렘 포스트』(The Jerusalem Post, Apr. 3, 1993)가 보도하였다. 1994년 말, 이스라엘은 중동의 평화를 위해 로마교황청에 ‘예루살렘의 양도(讓渡)’를 합의하였다. 예루살렘을 바티칸에 맡겨 세계 평화의 중심으로 삼겠다는 계획으로써 예루살렘의 시장으로는 이스라엘측과 팔레스타인측 시장이 선출될 것이지만 두 시장은 로마교황의 지시를 받게 된다. 예루살렘은 제2바티칸이 되어 교황의 지배하에 세 종교(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를 대표하도록 되어있다. 이스라엘이 로마교황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면 무역과 관광 등에서 큰 도움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간의 갈등도 쉽게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도 표시했다. 이스라엘을 삼겹 사겹으로 둘러싸고 있는 18개의 아랍국가들과 중앙에 놓여있는 이스라엘을 비교한 지도의 국토면적을 보면 이스라엘은 마치 대형 축구장 한 복판에 놓여있는 휴대용 노트북 컴퓨터 한 대와 같은 크기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로마교황 아래 두기로 제시한 이스라엘의 ‘라빈’(Yitzhak Rabin, 1922-95)수상은 1년이 채 못되어 암살 당했다. 그는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로서 고토(故土)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최초의 수상이었다.

0079. 『라테란』공회
AD 445년 야심적이며 활동력이 강한 로마의 『레오』주교는 로마교회의 수위권에 몰두, 스스로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 선언하고 로마교회의 우위를 주장하기 위해 성경에 없는 교리들을 창안해 내기 시작하였다. 황제의 에큐메니칼 교회가 존속한 325-1054년 까지는 아직도 황제 자신이 교회의 머리가 되는 최고승원장(Pont. Max.)의 칭호를 지니고 있었고, 이 기간동안에는 로마교회의 교황권을 언급한 믿을 만한 문서는 단 하나도 존재한 적이 없다. AD 1054년, 수위권 다툼으로 동방교회와 갈라진 로마교회는 1123년에 가서야 유럽대륙에서는 처음으로 자기들만의 모임인 라테란(Lateran) 공회를 개최하였다. 그 후 최근의 제2바티칸공회(1962-65)에 이르기까지 13번의 공회는 모두 로마카톨릭교의 영토안에서 개최되었고 동방교회에서는 이를 인정치 않는다.

0080. 십자군 원정의 시작
로마종교 안에 늘 있어온 세력다툼으로 동방교가 생겨나자 이 ‘어미’(The Mother, 계17.5)는 곧이어 십자군원정이란 악(惡)을 세상에 내어보냈다.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성지순례자들을 보호한다는 구실 등과 함께 1096년 부이용(Bouillon, 현 벨기에 남부의 小都)에서 시작된 첫 십자군원정군은 처음부터 로마교황청의 대외기업(對外企業)으로서 약탈과 살인을 일삼았다. 예루살렘 성을 장악, 땅 위의 모든 권위의 구색을 갖추려고 하였던 이 어미 종교는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4:26) 기록된 기독교의 어머니의 모조품이다. 『라틴』형의 십자가로 요란하였던 『십자군』들은 『유대』인 등을 대량 살육하였고, 200여 년 동안 유럽사(史)를 피로 칠한 7차의 십자군원정은 로마카톨릭교회가 산출해낸 탐욕의 열매로써, 로마교황의 세속적 권력을 크게 증대 강화시켰다. 옛 로마제국의 혼(魂)은 1273년에 다시 로마카톨릭교회 안에서 신성로마제국이란 제국을 품었다. 제수이트 교육을 받은 볼테르(F. Voltaire, 1694-1778)에 의하면,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적(的)이지도 아니한(사실은 『게르만』적이었다.), 한 제국도 아닌’, 이 비밀의 큰 바벨론은 세상영토 확장에 광분하였다. 오늘 날까지 로마교황은 해외여행 중 비행기에서 내리면 그 나라의 영토에 입맞춘다. ‘이 땅도 로마카톨릭교회의 영토가 되게 하소서’라는 염원과 함께...

0081. “교회와 국가를 하나로 묶은 『니케아』(Nicaea) 공회”
에큐메니즘 종교사에 나타나고 있는 공회를 기독교회 공회라고 믿는 것은 중대한 오해이다. 이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이 아닌 종교에서 찾는 어리석음과 같다. 예루살렘 공회 이후로 모든 공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적하는 교리를 산출한 ‘사단의 회’(계2:9)였다. 교리제정, 이단근절의 미명하에 콘스탄틴 황제의 명(命)에 의해 소집된 니케아(Nicaea, AD 325)공회는 교회와 국가(Church and State)를 하나로 묶는데 이용된 공회였다. “그리스도의 신성”교리를 제정하였다고 하나 성경에 이미 예수님의 신성이 기록되었으며, 콘스탄티노플 공회(AD 381)가 “성령의 신성”을 제정하기 전에 이미 성령께서는 신성하셨던 분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해서 성경이 “성(聖, Holy)”령이라고 말씀했단 말인가? 마치 인간들의 공회가 산출한 생명없는 거짓된 고백이 기독신앙을 보호해온 것 같이 착각말라. 황제들은 공회들을 정권유지의 목적으로, 이미 권력의 창부로 타락한 교회를 교리제정의 미명하에 황제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을 때는 언제든지 소집이 가능하였다. 로마종교의 이단교리들 대부분이 이러한 공회를 통해서 산출되었으며, 성경에 기록된 모든 공회는 늘 주님을 대적한 사단의 공회였다(요한11:47-53 및 행4:14-28 참조, 꼭 읽으시기를...).

0082. “하나님의 어머니 마리아?” 에베소 공회(AD 431)는 마리아를 두고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란 이름을 뒤집어 씌웠고, 이 교리는 1931년 비오 11세에 의해 재확인되었다. 칼케돈 공회(AD 451)가 마리아 숭배(Mariolatry)을 제정함으로써 이교의 대모(Great Mother) 숭배죄에 빠지게 하였다. 져스티니안 황제는 콘스탄티노플 공회(AD 533)를 이용,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원리를 이용, 지상통치를 꿈꾸었고, 로마의 주교는 세계교회 위에 군림할 음모를 꾸몄다. 기독교 고전(古典)의 하나로 둔갑한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은 실제로는 ‘요한 계시록’을 철저하게 대적하는,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반역하는 책이다.

또 다른 니케아 공회(AD 787)는 죽은 성자, 순교자에 대한 기도의 효험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공회였다. 사제들의 결혼을 금한 라테란 공회(1123년), 수백 년 동안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한 악명 높은 종교재판소는 베로나 공회(Verona, 1184)가 만들지 않았던가! 화체설 교리를 만들고, 사제들에게 고해성사를 하도록 한 라테란 공회(1215년), 그레고리 9세에 의해 성경을 금서(禁書)로 확정하고 생명에 이르는 길을 차단한 발렌시아 공회(1229년), “주의 만찬”에서 성도들에게 잔을 금한 콘스탄스 공회(1414년), “7성례전”을 제정한 플로렌스 공회(1439년), 트렌트(1545-63년) 공회들... 무슨 말을 더하랴?


환란 중에 하는 말 예수 구원하신다
다시 살아나시어 예수 구원하신다
지은 죄를 인하여 슬픈 맘이 있어도
숨질 때에 내 할 말 예수 구원하신다
(찬송가 252 / 기쁜 소리 들리니 ③)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4인 4색 밴쿠버 목양일기







10여년 전에 홍석천이라는 개그맨이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을 했습니다. 이 일로 지금까지도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이 분 덕분에 동성애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많이 바뀐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동성애를 옹호하지도 않고, 동성애자도 아닙니다. 그런데 저를 좀 커밍아웃 하려고 합니다. 목사로서의 커밍아웃입니다. 제가 크리스챤 신문에 글을 쓰기로 했다고 알리자, 아내는 제발 너무 솔직하게 쓰지 말라고 부탁을 합니다. 주변의 목사님들도 목사의 품격을 지켜서 쓰라고 충고를 합니다. 저에게 작은 욕심이 있다면 목사의 품격보다는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서, 삶에서 부딪치는 일들에 대한 고민과 거기서 얻는 작은 깨달음이라도 솔직하게 나누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 글을 쓰게 된 동기일 뿐입니다.

2000년부터 밴쿠버 이민생활을 하면서, 한동안 목사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린 적이 있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이유입니다. 가장으로서 의식주를 책임지기 위해서는 목사의 품격만 가지고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아닌 다른 필드에서 여러 직업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누군가는 저를 부장님, 선생님 또는 그냥 일하는 아저씨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자랑하고 내세울 일은 아니지만 이민자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를 이해할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과 경험이었습니다.

공항 라이드를 한 적이 있습니다. 손님 중에 크리스챤이 많았습니다. 가끔 저에게 전도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어느 교회 다니세요?” 묻고는 자기 교회를 소개합니다. 대부분 큰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 더 적극적입니다. 교회에 대한 자긍심이 강해서 그런지 교회에 다닌다고 해도 노스 밴쿠버에 살면서 써리에 있는 교회에 다니는 분이 자기 교회에 나오라고 설득을 합니다. 꼭 그래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한 번 이야기 했으면 합니다. 하여튼 이런 상황들이 저에게 심적인 부담이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목사인데 먼저 전도하고 새로 시작된 우리 교회를 알려야 하는데, 반대로 전도를 받는 상황이 벌어지니 속으로 답답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도 직업 특성상 한 번 만나고 다시 만나는 경우가 적어서 나름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습니다(반어적 표현입니다).

제가 좀 내성적입니다. 어릴 적 수업 시간에 방귀가 나오는 걸 너무 오래 참다가 속병이 난 적도 있습니다. 성품 탓인지 ‘크리스챤이다’ 라고 말하는 게 너무 어렵습니다. 뒤돌아보면 모태신앙인 저는 크리스챤이란 사실을 공개하면 따라오는 시선과 제약이 싫어서 그랬던 거 같습니다. 사도행전 11장을 보면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크리스챤)이라는 호칭을 듣게 됩니다. 안디옥 교회도 이민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파송된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그들은 신앙으로 살면서 삶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다르다’는 의미로 존경심을 담아 크리스챤이라 불리게 된 겁니다. 저에게 이번 글쓰기가 ‘달라지기 위한 의미 있는 커밍아웃’이 될 거라 믿습니다.

아마도 앞으로 저희 4인의 목사들은 개척교회 혹은 지역 교회를 담임하면서 목회현장에서 경험하는 일들에 대해 진솔하게 자신들의 색깔로 표현하며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저도 이번에 단단히 마음먹고 목사로서, 또 이민자의 고단한 삶 가운데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던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어떻게 하면 어지러운 이 세상 속에서 온전한 크리스챤으로 살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해 보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기회를 주신 크리스챤 신문 발행인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오세규 목사 / 밴쿠버오늘교회 / 778-887-8648]
 
 
 
 
 

사망에서 생명으로 (4)



5. 원수를 사랑하라!



하나님 나라의 자유인으로 오늘을 살고계시는 밴쿠버 그리스도인 여러분에게 깊어가는 가을과 함께 더욱 차원 높은 주님과의 끈끈한 교제와 소통이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새벽기도시간에 만난 하나님, 그 짧은 시간에 내 인생을 이미 디자인하시고 방콕에 오기까지 치밀한 계획 가운데 인도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면서 나의 생명을 창조하시고 또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실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 앞에 저는 감격하고 또 감격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뚜렷하고도 정확한 한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소리였습니다.

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행을 결심한 저에게는 분명한 세 가지 목적이 있었고 그 중에 한 가지가 바로 ‘원수를 복수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정확하게 나의 마음을 꿰뚫어보실 줄은 상상도 못했기에 그 음성을 듣고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나를 괴롭게 하고 아프게 했던 사람들을 향한 보복과 복수는 당연한 것이고 정당하다고 변론할 만도 했을 텐데 놀랍게도 저는 그 음성을 들음과 동시에 눈앞에 보여지는 환상을 보면서 바로 주님께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눈앞에 보여졌던 그림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흘리시는 주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주님을 바라보면서 떠오른 말씀은 ‘내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 3:16)라는 이 땅의 모든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사랑이셨습니다. 하여 저는 “아, 주님! 나를 괴롭히고 못되게 굴었던 그 사람들(한족+조선족)이 주님을 몰라서 그랬군요. 그들이 주님을 알았더라면 그런 나쁜 마음으로, 나쁜 짓을 하지 않았을 텐데요.”라고 고백하면서 그냥 그 사람들이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주님이 시켜서 되었던 것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십자가의 복음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성령이 도우셨기에 그냥 되어진 것이었죠. 주님을 만나는 자리에서 성령은 제 스스로 깨닫게 하셨고 십자가의 참 복음에 대하여 동의하게 하셨던 것이죠. 이러한 첫 만남의 현장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저의 신앙고백을 하게 하신 것이 결코 그냥 되어진 것이 아님을 저는 훗날 사역하면서 더 깊이 깨닫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관찰하다보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들을 만나주시는 방법과 모양이 다 다른 것을 알게 됩니다. 어쩌면 그 첫 만남의 부르심이 그 사람의 destiny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주님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위와 같은 고백을 하게 하신 이유는 바로 제 인생 전체를 이끌어가실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핵심이었음을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 이 문제는 특별히 한민족 안에 시행되어야 할, 영적인 묶임들을 풀어낼 수 있는 귀한 키 같은 것이었습니다. 억지로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간구하며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경지까지 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만 하고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화해자로, 화해의 직분을 감당하는 민족으로 서게 될 것이고 종국적으로 열방이 주님 안에서 화해의 열매를 맺도록 이끄는 귀한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들 사이에 막힌 담을 육체로 헐어내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방문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계속>

[오 테레사 선교사 / ot2022@hanmail.net]
 
 
 
 
 

교회음악Plus


찬양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



찬양이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찬양은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우리의 속에 있는 인격과 내적인 행위를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가 누구이신지를 증거하며
우리가 믿는 믿음을 밖으로 드러내게 되므로 우리 자신의
믿음과 생각과 생활을 스스로 돕게 되는 것이다.

시편을 읽다 보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성품과
그의 인품을 보고, 알게 되며,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찬양인 것이다.

(시 9편 1절)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홍동근 / 목사, Music Minister

정성헌 선교사 선교칼럼 (40)



내가 이제야 응답하노라



카라칼팍스탄에 도착한 나는 아파트를 임대하여 기거하며 교회개척을 시작했다. 옆집에는 새롭게 선교사로 부임한 연세가 지긋하신 김 선생님 가정이 살고 계셨다. 김 선생님은 미국에서 동원사역을 하시다가 현장으로 나오셔서 학원에서 비즈니스 영어를 가르치고 계셨다. 아침마다 사모님이 가족을 두고 온 나를 불러 식사를 대접했다. 나는 늘 허기지듯 아침이 기다려졌다.

과부 6-7명과 아이들로 모여 시작된 가정교회는 고려인 문화센터 안에 있는 방 하나를 임대하여 예배처를 옮겼다. 한국에서 목사가 왔다는 소문과 함께 본격적인 전도가 시작되면서 가정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두고 와서 홀로 때론 외로움이 몰려 왔지만 갓 예수를 믿기 시작한 성도들을 양육하고 열심있는 몇 사람을 집중적으로 훈련하느라 변변찮은 러시아 말로 하루 하루를 치열하게 살고 있었다.

혼자 생활한지 3개월이 지난 11월 중순. 성도 한 사람이 급히 달려왔다. 한국사람이 자기 집으로 전화를 해서 나를 찾았는데 다시 전화를 할 것이니 나를 불러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택시를 잡아 타고 그 집으로 갔다 얼마 뒤 전화 벨이 울렸다. 놀랍게도 수영로교회 선교담당목사였다. 그 당시만 해도 그 곳으로 국제전화가 연결되질 않았다. 놀란 나는 어디서 전화를 하느냐고 물었다. 타슈켄트에 도착해서 파송선교사를 방문 중인데 내일 선교부장 장로님과 함께 나를 만나기 위해 내가 있는 곳으로 내려 올 것이라며 비행기 도착시간을 알려주었다. 나는 갑자기 웬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기쁜 소식을 들고 갈 것이라며 전화를 끊었다. 기쁜 소식? 설레는 마음으로 거의 잠을 설쳤다.

시골 한적한 공항에 내린 두 사람의 차림새가 튀어 멀리서도 한 눈에 들어왔다. 마중 나온 나를 연세 지긋한 장로님께서 꼭 껴안아 주시며 “목사님, 수고가 많으십니다. 저희 교회에서 목사가정을 파송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무리 연락을 취해도 제대로 연결이 되질 않아 직접 현장을 방문하고 목사님을 모시고 갈려고 왔습니다. 파송준비가 다 되었으니 한국으로 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교회가 본 출신교역자가 아니면 파송하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는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선교담당목사는 교회가 숙고 끝에 우리 가정의 파송하기 위해 규정을 고쳤다고 설명했다.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놀랍기만 했다.

한국에서 손님이 왔다는 소식에 온 성도들이 모여 두 분을 환영했다. 장로님은 처음 예수를 믿는 고려인 할머니들의 간증을 듣고는 감격하셔서 제대로 드시지도 못했다. 그렇게 몇 일을 지내고 나는 두 분을 따라 파송을 받기 위해 한국으로 갔다.

떨어져 생활하던 아내는 거의 회복이 되어 있었고 아이들도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다. 파송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에 아내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부산으로 내려간 우리 가족은 교회에 도착하여 게스트 하우스로 안내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몇 일간 잠을 설쳐야 했다. 숙소는 골목 하나를 두고 본당 지하의 기도실과 불과 몇 미터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밤새 기도하는 소리로 숙면하기가 어려웠다. 몇 일이 지나자 기도실에서 부르짖는 기도의 내용들이 조각모임 하듯 내 마음에 그려졌다.
‘부산성시화, 민족복음화, 세계복음화’
이삼 주가 지나고 파송예배를 드리는 날이 되었다. 예배 직전 나는 먼저 기도하기 위해 본당으로 들어갔다. 본당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앞자리로 걸어 나가는데 강대상과 붙여진 배너가 한 눈에 들어오는데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로 9개월 기도할 때 꿈으로 보여주셨던 그 꿈 그대로 였다. 흰 강대상과 뒤에 걸려진 ‘카라칼팍종족입양 정성헌, 김은숙 선교사 파송예배’라고 쓰인 배너. 내 마음의 소원을 주시고 결국 이루어주신 그 주님 앞에 감사하고 감격했다.

파송예배가 시작되었다. 선교사 서약이 끝나고 안수를 하는데 많은 분들이 강대상으로 올라와 파송기도를 했다. 그 많은 기도 속에서 끓어 앉은 나에게 주님이 찾아 오셨다. 내 귀엔 더 이상 어떤 사람을 기도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슨 차단벽, 마치 방음벽이 쳐진 것 같았다. 주님은 일대일로 대면하시는 것처럼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야 10년 전 너의 기도를 응답하노라.” 순간 나는 주님, 제가 10년 전에 무슨 기도를 했지요라는 질문이 나갔다. 그러자 너무도 선명하게 사진처럼 한 장면이 크로즈업 되며 나타났다.

서울올림픽이 한창이던 1988년 9월말 올림픽선교컨퍼런스가 열렸던 서울광림교회 본당에서 내가 정필도 목사님의 와이셔츠 옷깃을 붙들고 기도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주님 저는 서 발 장대를 휘둘러도 맞을 사람이 없는, 사돈에 팔촌 중에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없는 가정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 민족복음화, 세계복음화를 위해 목회하신다는 이 분과 동역할 기회를 주십시오”

[SEED Canada 대표 / 778-316-35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