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0일 일요일

4인4색 밴쿠버 목양일기






얼마 전에 미국에 잠시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세미나 강사를 모시고 씨애틀에 다녀오다가 밸링햄에서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비가 많이 내렸는데 차에서 내려 나오는 데 바닥에 떨어진 지갑을 발견했습니다. 너무 낡은 필통 같아 보여 그냥 지나치려다 혹시 하는 마음에 열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놀랍게도 신분증과 신용카드 그리고 현금이 들어 있었습니다. 신분증의 주인은 백인 여성이었는데, 아마 비가 많이 와서 급하게 움직이다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추측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할지를 다른 목사님들에게 물어보니 식당 주인에게 맡겨놓으면 아마도 찾으러 오지 않겠냐고 대답을 합니다. 식당 주인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지갑을 맡기고 돌아서는데 문득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식당 주인을 어떻게 믿지? 저 사람이 중간에서 가로채면 어떻게 하지! 이렇게 하는 것이 최선일까? 이런 의심 가운데 혹시 하나님께서 저 지갑에 든 돈을 오늘 저녁식사 비용으로 예비해 주신 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날 저녁은 제가 사기로 했었고, 식사비용이 지갑에 있던 현금액수와 얼추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제가 만약 그 지갑 속의 현금이 하나님이 미리 예비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 돈으로 밥을 사 먹었다면 잘 한 일이었을까요? 아마도 대부분의 성도님들은 잘못했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가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런 식으로 오해 할 수가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일반 상식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맞을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날 저희 교회 앞으로 미국에서 두툼한 카드가 왔습니다. 워싱톤 주에 사시는 어떤 분이 보낸 카드였습니다. 저는 혹시 하나님께서 어제 한 일에 칭찬으로 뭔가 보답을 주시는 것이 아닐까라는 어리석은 기대를 가지고 봉투를 열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또박 또박 써놓은 카드 한 장과 설교시디 그리고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베리칩(Verichip)에 관한 홍보물 뿐이었습니다.

어쨌든 시디 내용을 들어보니 미국 LA에서 사역하는 어떤 목사님이 베리칩은 짐승의 표(666)이고, 이 칩을 받으면 멸망을 받는다는 참 열정적인 설교였습니다. 그런데, 좀 내용이 정확하지가 않습니다. 사실(fact) 보다는 추측(fiction)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첫 부분에서 캐나다 정부가 화폐를 다 폐지하고 오직 베리칩 만으로만 거래할 수 있도록 결정했다는 주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제 주변에서도 베리칩에 관한 논란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저는 사실 베리칩이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짐승의 표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의 내용은 다니엘서 7장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둘 다 묵시(예언서)문학의 형식을 취하기 때문입니다. 묵시록의 특징은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기에 해석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시대적 상황을 보면 두 시대가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환난을 당하는 시기였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온전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핍박과 맞서야만 했습니다. 이런 시대 상황 가운데 사도 요한과 다니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믿음의 인내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온전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동일한 믿음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베리칩을 받으면 구원 받지 못하고 안받으면 구원 받는다는 식의 주장은 구원을 너무 유치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종말의 시대에 깨어 있어야 하고, 세대를 분별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음모론적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직접적으로 베리칩을 짐승의 표, 즉 666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몇 몇 분들이 베리칩 일 것 이라고 해석을 하는 겁니다. 해석은 잘해야 합니다. 경험상 과거에도 잘못된 해석으로 피해를 준 적이 많았지 않습니까? 해석을 잘못하면 마치 제가 지갑을 주워서 주인을 찾아주지 않고 내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여겨서 밥값으로 쓰는 행동과 비슷합니다. 상식적이지도 않고 한마디로 참된 하나님의 뜻을 곡해할 여지가 너무 많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베리칩만으로 구원을 판가름할 수 있다면, 오히려 구원받기 더 쉬울 것 같습니다. 안받으면 되니까요! 베리칩만 가지고 구원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인 구원을 매우 값싸게(베리 칲하게-very cheap)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세규 목사 / 밴쿠버오늘교회 / 778-887-8648]
 
 
 
 
 

아브라함 이야기

 

 

선지자 아브라함 / 창 20:1-7 (상)


창세기 20장은 다시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랄로 간 아브라함
1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네게브’는 남쪽을 의미하며, ‘그랄’은 서쪽을 의미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하면 남서쪽으로 옮겨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18:1절에 나오는 ‘마므레’에서 남서쪽인 블레셋 사람의 지역 ‘그랄’로 옮겨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동한 이유는 나와 있지 않지만 창 12:10의 말씀에 비추어볼 때, 아마도 양들을 먹일 풀을 찾기 위해 남쪽으로 옮겨갔을 것입니다.

문제를 만난 아브라함그런데 옮겨간 곳에서 아브라함은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2절). 즉, 그랄 사람들에게 사라를 누이동생으로 소개했는데 그 일 때문에 사라가 그만 아비멜렉의 후궁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집트 사건과의 유사성
2절의 말씀은 창 12:10-20절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서로 다른 전통을 가진 자료들을 수집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자료의 중복으로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성경의 이야기가 구전되어 내려오다가 문서로 기록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편집을 하였다면, 중복되고 비슷해 보이는 이야기는 누가 보더라도 이야기를 짜맞추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둘 중 하나만 선택하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약점
만약 본문의 말씀이 같은 사건의 다른 버전이 아니라면, 이것은 아브라함의 약점을 우리에게 설명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실수는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약점이 있습니다. 신체적인 약점이 건강이 약해질 때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처럼, 영적인 약점도 주변의 어려움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면, 가장 먼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약점은 두려움과 거짓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결단력도 좋았고, 참고 인내할 줄도 알았지만,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쳐올 때, 두려워했고,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거짓말을 했던 것입니다.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아브라함이 믿음이 약해져 가나안을 떠나고, 목숨을 보전하고자 거짓말을 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한 번도 그를 직접적으로 꾸짖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대신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3절). 여기서 ‘네가 죽으리니’라는 말은 아비멜렉이 병들었음을 암시합니다. 즉, 아브라함의 말을 듣고, 사라를 후궁으로 들인 아비멜렉이 갑자기 병들었고, 병의 원인이 남편있는 여자 때문이라는 것을 아비멜렉이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비멜렉의 집에는 불임의 문제까지 생겼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 (18절). 그 결과 아비멜렉은 사라를 가까이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4절).

아비멜렉의 항변죽을 병에 걸리자, 아비멜렉은 억울하다고 하나님께 항변을 합니다: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4-5절). 여기서 ‘의롭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차디크’ (ṣaddı̂q)이며 ‘righteous’를 뜻합니다. 그리고, ‘온전한 마음’이란 히브리어로 ‘톰-레바브’이며 ‘perfection of heart’를 의미합니다. 특히 두 번째 단어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창 17:1)과 의로운 욥 (욥 1:1, 8)을 지칭할 때 쓰일 정도로 굉장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아비멜렉이 자신의 ‘온전한 마음’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도 아비멜렉의 온전함을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이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6절). 왜 하나님께서 잘못도 없는 아비멜렉에게 어려움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재미있는 사도행전

 

 

 

2013, 꿈에 미쳐라! (2)



2012년 개최된 영국 런던올림픽을 은퇴 무대로 선언한 수영황제 ‘마이클 펠프스’는 6개 종목에 출전해 금메달 4개, 은메달 2개를 따내며 세계 최강자의 명성을 과시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은 펠프스 수영 인생의 ‘화룡점정’이었다. 총 8개 종목에 출전한 펠프스는 모든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8관왕에 올라 올림픽 역사상 단일 대회 최다 다관왕에 올랐다.

얼마전 펠페스에 대한 기사 하나가 떴다. 타이틀은 “한계를 모르는 수영 황제 펠페스의 신기록 행진”이었다. 펠페스는 어린 시절 “주의력 결핍 과다 행동장애”가 있었다. 그로 인해 친구들로부터 화장실 변기에 머리를 쳐박히는 수모까지 겪었다. 그러나 이런 아픔을 딛고 위대한 수영선수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펠페스의 어릴적 코치 바우먼 때문이었다. 바우먼은 항상 운동을 시작하기 전, 펠페스에게 목표를 종이에 적은 후 운동을 시작하게 했다. 이것 때문에 그는 매일 자신이 정한 목표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나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함을 받았습니다”(롬1:1)
사도 바울은 자신의 꿈을 철저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그는 그의 비전을 실현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나는 여러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스페인)로 갈 때에 로마까지 가기를 바랬습니다”(롬15:23).
그는 구체적으로 꿈의 실현을 계획했다. 머리로만 그린 꿈이 아니었다. 꿈의 기록은 꿈을 자신에게로 끌어 당기는 강한 힘이 있다. 또한 꿈의 기록은 강한 실천의 원동력 이다.

꿈에는 두 종류가 있다. ‘어리석은 부자형 꿈과 바울형 꿈’이다. 어리석은 부자형 꿈은 오직 자기 배만 채우 것이 목적이다. 누가복음12장17-19 보라! 이 짧은 세 구절 안에 ‘내가, 내’라는 말이 6번 나온다. 부자의 꿈 안에는 오직 자기 자신 뿐이었다. 바울형 꿈은 어떤가! 철저히 하나님을 향해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그리스의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더는 큰 꿈을 꿨다. 더 많은 땅을 가지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알 수 없는 병에 걸렸다. 죽음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으면 두 손을 관 밖으로 내 주세요” 그 이유는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천하를 한 손에 쥐었던 알렉산더도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합니다”.


중국의 황제 진시왕은 서시라는 사람에게 명령했다. “소년 소녀 3천명과 보물을 싣고 동해에 있는 신선이 사는 섬으로 가서 불로장생의 약초와 약을 구해오라!” 물론 그런 약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일을 두고 많은 유생들이 비웃기 시작했다. 화가난 진시왕은 460명의 유생을 생매장하고 그들의 책까지 불태워 버렸다. 이것이 그 유명한 ‘분서갱유’ 사건이다.

이들과 차원이 다른 최후의 고백을 들어보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노라”(딤후4:7-8).
정말 멋진 고백이다. 자신만의 꿈과 비전을 위해 달린 자는 꿈도 꿀 수 없는 고백이다. 하나님이 주신 잃어버린 꿈이 있는가? 회복하라! 그리고 2013, 그 비전에 미쳐라!

황보창완 목사 / 밴쿠버 글로리아교회 / 778-708-5540
 
 
 
 
 

필객의붓



 
  

인간의 본질

창가에 앉아 새로 이사한 동네의 밤 거리에 투명한 빗금을 그으며 내리는 비를 올려다 보며 땅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앞 집의 오래된 굴뚝에서 흩어지는 연기처럼 잡힐 듯 말듯, 어릴 때의 감상과 이름 모를 그리움이 마음에 스멀거립니다. 아버지 없이 각박하고 힘들기만 했던 시간이라 별로 들춰보지 않는 기억들 속에서도 푸근한 그리움을 피워 올리는 세월에게 인자한 성품을 느낍니다. 눅눅하고 짙은 어둠에 잠긴 집들의 창에서 티브이 불빛이 번쩍이고 있습니다. 실내를 어둡게 해놓고 티브이 불빛을 바라보고 있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외롭고 우울한 현대인들의 초상을 느낍니다. 음산할 정도로 어두운, 살아가는 의미마저 휑하고 우울하게 느껴지는 비오는 겨울을 잊기 위함이겠지만 너무나 소중한 생의 시간이 화면 앞에서 스러지는 것이 무척 아깝습니다.
티브이의 역사와 함께 사람들은 존재감, 자신의 가치, 인격과 인격이 부딪혀 얻을 수 있는 순박함과 지혜와 사랑과 분별을 잃어버리고 더 자존심 세고 상처받기 쉬운 닫힌 인간으로 변질되고 있으며, 비본질의 성탑은 자꾸만 높아만 가서 심하게 훼손된 본질 속에 살아가는 부조리와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권력이 권력으로만 커져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삶을 압제하고, 교육이 교육으로만 문턱이 높아져 어렵고 난해한 책의 분량이 도서관을 가득 채울만큼 쌓이고 전문인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원기가 팔팔한 젊은 날 동안 자기의 경험을 죽이고 오직 책만 끼고 있어야 하며, 모노폴리의 경제는 한쪽으로 재물을 쌓는 쪽으로만 발전해 갑니다.
많은 정보들과 미디어의 높은 볼륨 속에서 사람들은 이 복잡한 미로 같은 많은 길들 속에 어느 길을 택해 가야 할 것인지, 이렇게 많은 형상들 속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할 것인지, 많고 많은 색들 중에 나는 어떤 색으로 피어 있어야 할지, 다양한 소리들 중에 어떤 소리를 내야 할지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합니다. 대낮에도 담을 더듬듯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에 대한 전문가들까지 생겼지만, 그들이 하는 소리를 들어봐도 본질을 꿰뚫는 통쾌한 지혜보다는 오히려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 일관성 없는 이론으로 아리송하게 흘러갑니다.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일상의 삶, 몸 담고 있는 건물도 번화하고 놀랍도록 신기술이 쏟아져 나와 이보다 더한 발전이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인간의 생활의 편리가 극에 달했고 인간의 교육은 문맹이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이 되었지만, 인간 관계의 땅은 더 황폐해져 불안과 불면과 우울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갑니다. 이생의 자랑으로 세워진 거대한 성에 신경증과 불안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잘남과 못남, 가짐과 없음, 학벌의 차이가 마치 대단하고 영원한 것처럼 느끼며 비교하며 살아가면서, 남의 이목의 노예가 되어 모든 관심과 신경이 온통 성과나 주변의 사람들의 평가와 인식에 가있어 끊임없이 불안에 시달리지만, 혹독하게 자신을 평가하는 눈들과 소리들은 실상이 아닌 자신의 상상이 만들어낸 것들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눌림을 감당 못하고, 우리 평범한 사람들은 단 한루만 누려봐도 영광일 화려한 인기와 권력과 명예나 우리 같은 서민들은 평생 써도 못쓸 만한 가치의 재산을 두고서도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갑니다. 아무런 무게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허무에 그토록 마음이 짓이겨지며, 들리지도 않는 소리들에 지레 두려워하고 파르르 떨면서도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지금 공부하고 있는 고린도 후서의 말씀에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자지 못하고 매를 맞고 후욕을 당하고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갇힘 속에 있으면서도 영광을 느끼고, 자신이 악한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을 아름다운 이름으로 여기고, 속이는 자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참됨의 자부심을 느끼며, 아무 것도 없는 가난뱅이 같은 삶을 살면서도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의 부요를 누리는 행복 속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인간의 본질, 인간의 본질은 믿음에 속해있는 증거일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영원에 속해 있어 찰나적인 기쁨이나 쾌락이나 표피에 대한 자랑으로 절대 채울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예배입니다.
나무가 땅에 심겨져야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며 물고기가 물에 있어야 살 수 있듯,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함 속에 있어야 가장 인간다운 향기와 존귀로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인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의 삶 안에 있도록 지어졌습니다.
교회 안의 어떤 사람들은 귀에 듣기 좋고 끝없이 이생의 복을 추구하는 자아를 만족시켜 주는 좋은 말씀을 찾아 헤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십자가를 통과한 새 생명을 얻지 못해 여전히 육적인 것들에 흔들리며 복잡하고 변덕스러운 감정과 상한 마음에 시달리며 일주일을 버티다가 교회에서 겨우 마취제 같은 말씀을 듣고 위안을 얻는 것이 신앙인 줄 착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귀에 거슬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폼나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정 반대의 길을 제시하시며 신앙 안의 위선을 지적하시는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정치 지도자들의 미움을 받았고 대중들의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명상과 자기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신을 거부하는 정신이 깊어지고 있는 뉴에이지의 때에,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 만이, 인간을 참 인간되게 하는 본질의 메시지 만이 오직 교회 안에 살아있기를 기도합니다.
[서수영 사모 / penofgod@gmail.com]
 
 
 
 
 

터키이야기 (15)


7. 소아시아와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

◇ 신약성경과 에베소 ◇

오순절 당시 예루살렘은 유대인의 교회 중심지였고, 안디옥은 이방인의 교회 중심지였으며, 바울의 순교 이후에는 에베소가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에베소는 성경시대에 버가모를 누르고 아시아의 수도가 되었으며, 소아시아 지방의 정치, 교통, 무역, 문화의 중심지였다. 에베소는 성경에 16번 언급되었다.

1) 사도바울과 에베소
에베소 전도는 체류 기간과 사역 규모로 보아 바울의 전 전도여행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다. 에베소는 바울이 2, 3차 전도여행 때 들렸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의 귀로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고린도에서 배를 타고 에베소에 들러 유대인의 회당에서 변론하고 가이사랴로 갔다(행18:19-21). 3차 전도여행 때(54-59년) 에베소에 와서 3개월간 회당에서 가르쳤고(행19:8), 그 후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3년 동안 가르쳤다(행19:9-10). 사도행전 20장에 기록된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행한 고별설교에서 3년 동안 밤낮으로 쉬지 않고 눈물로 가르쳤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 에베소뿐만 아니라 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포함하여 소아시아 전역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바울 이후에는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를 돌보았고(딤전1:3), 아볼로와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가 이곳에서 전도활동을 하였다(행18:24-26).

바울이 이곳에서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또한 이곳에서 감금된 듯하다(롬16:3,7; 고후6:4-10; 11:23-27; 고후1:8).

2) 사도요한과 에베소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바울이 순교당한 후 사도요한이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모시고 이곳에 와서 에베소 교회 목회와 전도를 하며 노년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핍박을 받고 밧모 섬으로 유배를 당했다가 다시 돌아왔으며, 요한복음, 요한서신서 등도 이곳에서 기록한 것으로 전해진다. 요한은 트라얀 황제의 통치기간 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자연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평소에 요한이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에 묻히기를 유언하여 동산에 무덤을 만들었고, 후에 유스티니아누스의 명령에 의해 요한의 무덤이라고 전승되어 온 장소에 교회가 세워졌다.

3) 계시록의 에베소 교회 (계2:1-7)
당시 황제숭배의 강요와 이에 따른 박해를 참으며 신앙의 정절을 지켰고, 거짓 사도들과 니골라당을 물리치고 진리를 분별하여 교리를 수호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처음 사랑을 잃었음을 책망하며, 처음 사랑의 회복과 처음 행위를 다시 되찾을 것을 권면하고 회개를 촉구하면서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긴 자에게는 낙원의 생명나무 과실을 주어 먹게 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당시 에베소의 형식적 전통주의와 넘치는 풍요로움이 처음 사랑을 잃게 하는 원인으로 지적된다.

4) 신약 이후의 에베소
AD 110년경,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속사도 교부 이그나티우스가 체포된 몸으로 순교를 당하게 될 로마로 호송 중 서머나에 들렀을 때 에베소에 보낸 서신이 남아 있다. 이그나티우스는 에베소의 신자들에게 당시 에베소 감독이었던 오네시모를 통하여 보여주었던 친절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 몇몇 권면과 당부를 전하였다. 특히 오네시모 감독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에서 바울이 빌레몬에게 “나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라”(몬20)라고 하면서 옥중에서 얻은 아들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뜻을 원용하였듯이, 이그나티우스도 바울이 사용한 동일한 동사를 사용하여 “나로 너희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라”라고 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빌레몬서의 오네시모와 이그나티우스의 에베소 서신의 오네시모가 동일한 인물이라는 주장이 자주 제기되었다. 만일 빌레몬서의 오네시모가 회심 당시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이었다면 이그나티우스와 만났을 때는 나이 70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특별히 시카고학파는 바울의 서신이 처음으로 모아진 것은 2세기 초 에베소에서였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을 대표하는 J. Knox 같은 학자는 감독 오네시모가 그 일의 책임자였으며, 빌레몬서도 바울의 서신 속에 포함시켰을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만일 오네시모가 후에 에베소의 감독이 된 것이 사실이라면 바울 옆에서 바울을 도우며 누구보다도 바울을 잘 알고 있었던 그가 바울의 서신을 모으는 일을 했으며, 빌레몬서도 자연스럽게 모음집에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오네시모의 이야기는 역사 소설가들에게는 매력 있는 주제가 되어 미치슨(N. Mitchison)이나 존(P. John) 등 여러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으며, “오네시모”라는 소설이 연재되기도 했다.

이그나티우스의 에베소의 20절에서 특별히 성찬식에 대한 언급을 할 때 요한복음 6장 50절을 염두에 두고 주님의 몸인 떡을 “불사약이며 죽음의 해독제”라고 언급하고 있다. <계속>




 <사진 위: 에베소의 사도요한 교회 / 아래: 성베드로 성당의 성 이그니티우스 조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