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일 토요일

교리문답ㆍ구속사적 설교 회복 절실






강단의 변화가 교회 개혁의 시작


이단, 신비주의, 번영신학, 신앙과 삶의 분리, 윤리 문제 등 한국 교회는 올바른 신앙 정립의 부재로 발생하는 복합적인 문제들로 영적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와 같은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한국설교학회(회장 정창균 교수 / 합신대)가 최근 개최한 제16차 정기학술대회에 발제자로 참석한 설교학자들은 교리문답 설교를 비롯해 구속사적 설교 등 강단의 변화에서부터 교회 개혁이 시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성환 교수(웨신대)는 잃어버린 신앙 유산인 교리문답 설교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성도들이 각종 이단의 사설에 현혹되고, 예언이나 환상, 신비체험 등과 같은 신비주의에 빠지는 이유는 목회자들이 성경을 왜곡해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라며 “성도들이 이단과 신비주의에 맞서 신앙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세우게 하려면 교리문답 설교를 반드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목회자들 가운데 교리의 중요성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문제다. 교리 연구는 지적인 것을 추구할 뿐, 영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 신학 지식을 많이 습득할 수 있지만 신앙과 삶의 괴리 현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 다양한 논쟁을 불러와 다투거나 자신이 속한 특정 교파만 옳다며 편파적인 성향을 갖는다는 것, 교리 연구가 때로는 말씀의 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것 등이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교리 연구는 비록 지적인 면에 많은 비중을 두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신자가 살아가고자 하는 열심과 성숙을 보일 수 있다”며 지적 노력 없이 영적 성숙을 이룰 수 없다고 역설했다. 즉, 올바른 교리 연구를 통해 자신의 신학(신앙)을 점검할 수 있기 때문에 신학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고, 신앙적 반성이 각자의 삶에 반영돼 보다 성경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교리문답 설교는 자칫 성도에게 지루함, 딱딱함, 심지어 교리의 주입과 강요함으로 인식될 수 있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교리문답 설교 계획을 철저하게 세워야 한다. 박 교수는 어떤 교리문답이나 신경, 그리고 신앙고백서를 설교를 통해 가르치고자 할 때, 각각의 구조나 특성을 반드시 파악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미 52주에 걸쳐 설교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그렇다고 52주에 맞춰 모두 가르칠 필요는 없다. 129개의 질문과 답으로도 구성돼 있어 129 주일에 나눠 가르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 다른 교리문답서들이나 신앙고백, 신조들도 마찬가지다.

박 교수는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는 목회자가 판단할 수 있지만 단순하고, 쉽고, 빠른 것을 원하는 세대에 맞춘다면 몇 개의 항목을 엮어 가르치기보다는 한 주에 한 항목씩 가르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고 제시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연속적으로 설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이 어렵다면 교회력에 따라 교리문답을 재배치해 설교할 수 있고, 교리문답서들의 내용 가운데 사회의 이슈들에 해답을 줄 수 있는 교리문답 항목을 엮어 시리즈 설교를 구성할 수도 있다. 박 교수는 “한국 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의 개혁과 변화를 위해 잃어버린 신앙유산인 교리문답 설교를 회복해야 한다”며 “교리문답 설교 운동이 일어날 때 한국 교회의 힘과 능력이 회복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조상현 목사(제자삼는교회)는 구속사적 설교를 통해 윤리 행위를 촉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목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가는 구속의 역사라고 하는 성경신학의 관점에서 특정 본문을 해석하는 구속사적 설교가 ‘여기와 지금’의 청중에게 소홀하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며 “하나님의 구속사는 개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이들로 구성되는 신앙공동체를 지향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 조 목사는 구속사적 설교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윤리 행위를 촉구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객관적 구속사만 드러낸다면 구속의 사건을 경험했던 성경 인물들의 반응과 삶의 모습은 철저히 배제될 수 있고, 그들의 삶을 통해 오늘의 성도들이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속사는 하나님의 활동과 그것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구속사 자체가 윤리적 행위를 촉구하는 설교의 정당성을 지지해준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구속사적 설교는 단순히 구속사를 드러내려고 하는 차원을 넘어서 그 내용이 청중의 삶과 구체적으로 관련을 맺을 수 있어야 한다. 조 목사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통해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일으키고자 하셨고, 또 요구하시며 기대하셨던 변화가 무엇인지 살펴서 오늘의 청중들에게도 동일한 하나님의 구속사건이 재현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구속사적 설교가 반드시 윤리적 행위를 촉구하는 설교이어야 함은 성경 자체가 입증해주고 있다”며 “예수님도 산상수훈을 통해 구체적인 윤리적 행동을 촉구하셨다”고 덧붙였다. 결국 구속사적 설교는 성도 개인이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 것을 촉구하고, 공동체적인 윤리 행위까지 촉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 목사는 구속사적 설교는 하나님과 성도 개인의 만남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구속사를 실현해 가는 현장인 신앙 공동체를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설교는 개인의 변화와 함께 신앙 공동체를 세워가도록 하는 이중적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구속사적 설교의 메시지는 단순히 성도 개개인의 구원과 윤리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차원을 넘어 신앙 공동체 전체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신앙 공동체 전체의 윤리적 성숙과 헌신으로 이끌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교회로 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igoodnews.net]
 
 
 
 
 

재미있는 사도행전



시민권 있습니까?



세계 역사상 가장 높은 가치를 지녔던 시민권 하나를 말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로마 시민권이라 할 수 있다. 2,000년 전, 전 유럽 사람들의 꿈은 ‘로마 시민권’을 손에 쥐는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글과 함께 실린 사진이 당시 청동으로 만든 로마시민권이다. 사실, 오늘을 사는 우리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대단한 것이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로마시민권의 매력에 한번 빠져보자!

무료 식량 배급, 죽을죄를 지어도 재판 없이 처벌 불가(행22:25),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의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행22:29), 어디 이것뿐인가? 로마시 안에 살면 수세식 화장실, 초호화 목욕탕 이용, 콜로세움(라틴어:거대한 건축물)에서 벌어지는 검투사들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 무료 관람 등의 권한이 주어졌다. 세상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는, 공휴일이 자그마치 135일이었다. 로마시민권을 가지면 일 년의 반을 먹고 놀수 있었다는 얘기다.

사도행전 22장22절을 보면 로마 시민권의 위력을 엿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천부장이 사도바울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자!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시민권을 얻었노라”라고 한다. 무슨 말인가? 로마 시민권을 얻기 위해 돈 장난까지 쳤다는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이렇게 대단한 로마 시민권을 “나는 나면서부터라”.

바울이 의심스럽다. 그는 진짜 로마 시민권자 이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이 간다. 고린도후서 11장에 가서 그의 고백을 한번 들어보자! “나는 매를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고, 강도의 위험, 자지 못하고, 굶고, 추위에 떨었습니다.(고후11:23-27). 이것이 로마 시민권자의 삶인가? 그는 왜 이렇게 산 것인가?

바울은 말한다. 자신의 분명한 소속이 어딘가를 “나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3:20). 멋있다. 정말 멋있다. 자신을 두고 “나를 본받으라.(빌3:17)고 할만 하다. 그는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 멋진 삶을 산 것이다. 마치 다니엘이 “바벨론에 있으나, 바벨론에 속하지 않는” 길을 택했던 것 처럼(다니엘1:8).

프랑스의 소설가 생텍쥐페리의 ‘갈매기의 꿈’의 주인공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은 단지 먹이를 구하기 위해 하늘을 나는 다른 갈매기와 달랐다. 그에게는 남다른 꿈과 이상이 있었다. 조나단의 이런 행동이 그를 다른 갈매기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결국 무리로부터 추방당하게 만든다. 우리의 수준을 높이자! 우리는 절대 땅을 향해 목 뼈가 굳어버린 돼지가 아니다. 우린 엄연히 차원 높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잊지말자! 확실히 붙들자! 이것 하나를 “나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3:20).

황보창완 목사 (밴쿠버성산교회 청년부) / 778-708-5540

 
 
 
 
 
 

4인 4색 밴쿠버 목양일기

 
 
저는 서비스업(業)에 종사하는 목사입니다
밴쿠버에서 사역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어떤 집사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공항 라이드를 부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찍이 이민목회는 섬기는 목회라고 배우고 들었던 바, 망설임 없이 한국을 방문하시는 집사님을 공항까지 라이드 해 드렸습니다. 이것도 나름 목회의 연장이라는 목사의 마음으로 기분 좋게 집사님을 내려드리려는 순간, 집사님이 제 손에 봉투를 건네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목사님! 공항라이드 하시는 분께 물었더니 보통 70불 정도 받는다고 하시네요. 70불 넣었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왜 그렇게 우울하던지요.
흔히들 이민목회는 섬김의 목회라고 말씀하십니다. 저 역시 목사로서 성도를 사랑으로 돌보고 섬기는 일은 당연하고, 아름다운 사역의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목사로서 소위 ‘목양 서비스’를 제공하는 단순 서비스맨이 되기는 싫은 것이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저는 개척교회 목사로 개척교회(소형교회)가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이 존재하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는 성도들과 밀접한 영적 관계 속에서 목양할 수 있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섬김과 헌신의 본을 실천하기에 더 없이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안타까운 현실은 그런 환경이 개척교회 목회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목회를 해보니 성도들은 교회를 통해 여러가지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받기 원하는 것 같습니다. 각종 성경공부, 소그룹 모임을 통한 다양한 교제, 그리고 체계화된 교회학교 시스템까지 개척교회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서비스들입니다. 물론, 교회가 성도들의 신앙을 성숙시키고, 삶의 변화를 꾀할 수 있는 그런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제공할 수 있다면 참으로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숙고해야 할 부분은 우리 모두 교회를 통해 서비스를 받는 일에만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조금 많이 나가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저는 목사로서 성도들에게 친절한 목양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퀵 서비스맨이 되어야만 한다는 심각한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인 자각입니다. 목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목회를 해야 하는데, 자꾸 사람들(성도들)을 경외하게 되는 목회로 방향성을 잡아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더 본질적인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예배하는 성도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예배를 의미하는 영단어 중 하나가 서비스(service)라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각종 서비스를 받고 누리는 곳이 아니라, 서비스를 행하고 드려야 하는 곳’이어야 맞지 않겠습니까? 목사나 성도 모두가 하나님께 서비스하는 예배자들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목사이기 이전에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한 사람의 예배자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목사의 직분을 감당하는 일에는 성도들이 모두 하나님께 온전한 서비스를 드릴 수 있도록 양육하며, 훈계하고 싶습니다. ‘교회는 서비스를 드리는 곳이지, 서비스를 받는 곳이 아닙니다.’ 때문에 저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목사로 인정받고 싶습니다. 이왕 서비스맨이 될 바엔 하나님 앞에 가장 최고의, 그리고 가장 최선의 것으로 서비스하고 싶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제게 두둑히 건네주실 팁(상급)을 기대하며 말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갈찌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대상 16:29)
[문경돈 목사 / 나무십자가한인교회 / 778-772-4738]

아브라함 이야기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창 18:17-21 (하)



기도의 소명을 깨달은 아브라함
1아브라함은 자신의 소명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롯이 살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도 복을 받아야 할 천하만민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앞에 담대하게 섰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12장에서 처음 부르심을 받은 후,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먼저 직접적으로 간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기도다운 기도를 할 수 있는 신앙으로 성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직까지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면 기도할 수 있는 신앙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기도한 아브라함 (25절)
25절은 19절의 말씀을 근거로 한 기도입니다. 비록 19절이 직접적으로 아브라함에게 한 말씀은 아니지만 아브라함도 곁에 있었기 때문에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2만 번 기도 응답을 받은 죠지 뭘러는 문제가 생기면 기도하기 전에 성경을 먼저 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에 부합되는 말씀을 찾으면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고 그 결과는 2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때로 기도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욕심과 정욕을 따라서 기도하기 쉽기 때문에 말씀에 근거하여 기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겸손하게 기도한 아브라함 (27절)아브라함은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티끌’이란 ‘아파르’ (ʿāp̱ār)와 ‘에페르’ (ʾēp̱er)의 복합어로서 ‘dust’와 ‘ash’를 의미합니다. 즉, 먼지에서 시작하여 재로 끝나는 자신의 실존을 파악했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그를 겸손히 기도할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시 10:17을 보면,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라고 나옵니다. 눅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한 비유가 나오는데,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자기를 내세우는 기도를 하였지만, 13절에 보면,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14절). 세리는 자신이 어떠한 존재임을 알았기에 비록 구체적인 간구도 못하고 통회만하였지만 그의 간구는 상달되었고, 하나님은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기도한 아브라함 (32절)
아브라함은 24절에 오십 명이 있다면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하시겠냐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에 수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워낙 타락한 성이라 오십 명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28절에서는 45명으로, 29절에서는 40명으로, 30절에서는 30명으로, 31절에서는 20명으로 그리고 32절에서는 10명으로 줄여서 기도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기도하되 철저하게 기도했으며, 지속적으로 기도했으며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귀찮아 하시거나 꾸짖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기를 원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신앙적인 불신과 완고함, 그리고 고집이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고 제거되어 영적으로 회복될 뿐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과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에 근거해서, 겸손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 원합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필객의 붓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새벽 빛이 움트기 전, 짙은 어둠에 잠긴 도시를 울리는 기차의 기적 소리가 인생이 너무 짧고 덧없다는 탄식처럼 쓸쓸하게 마음에 울립니다. 인생은 결국 혼자서 가는 여행이라고, 눈물겹도록 외롭고 허무한 여정이라 울부짖는 듯, 심난한 여운을 남기고 떠난 기적소리에 허물어지기 시작한 잠을 털고 일어나, 곁에 잠든 남편의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덮어 꼭꼭 여며줍니다. 자랑도 인기도 찬란한 이력도 어두운 허공에 차가운 망령처럼 떠있는 이 시간, 이런 작은 사랑의 동작이 내 마음에 온기를 지펴줍니다. 빛과 소리와 인파 속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또렷한 소리로 방안을 울리고 있는 시계의 초침소리가 본향을 향한 소망이 있는 우리에겐 생의 수명이 떠나가는 아쉬움이 아니라 영원을 향해 다가가는 설레임 임을 주지 시키며 헐거워진 생의 믿음을 하나하나 단추 채웁니다.

생계를 위해 성 매매를 하는 박카스 할머니들에 대한 기사 속의, 내 어머니의 뒷모습과 닮은 짤닥막한 노파의 사진 때문에 내내 마음이 저리고 아픕니다. 생에 대한 경륜이 짧고 눈 앞의 것 밖엔 생각할 줄 모르는 젊은 때는 미련하여 방탕하다가도, 늙어가면서 지난 날의 어리석음을 회한하며 삶을 맑게 정리하게 되는 순리마저 어지럽혀졌음이, 돈으로, 탐욕으로, 화려한 색으로, 선정적인 리듬으로 혼미한 가운데, 인간 정신이 망해가는 세대에 지혜를 주어야 할, 이생의 면류관 같은 존재들이 사회의 무관심의 사각지대에 버려져, 생계와 병든 육체를 치료할 약 값을 벌기 위해 들개처럼 떠돌고 있음에 마음에 애통이 일어납니다.
심판 날에 이 성보다 소돔과 고모라가 견디기 쉬울 것이라 하신 예수님의 탄식이 한국 땅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고대의 신전처럼 거대하고 화려한 쇼핑몰을 걸을 때마다 실로 이곳이 매몬의 신전이 아닐까 생각이 들곤 합니다.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의 동상처럼 눈매가 관능적인 모델들의 화보아래서 사람들은 돈을 갈망하며 예배하고, 돈을 많이 벌길 소망하고, 물질을 우러러보며 돈의 가치를 절대화합니다. 돈을 경배하는 정신에 취해 매몬의 신전을 오가는 사람들의 눈동자에 만화의 그림처럼 달러의 표지가 씌운 듯 느껴집니다. 한국도 북미처럼, 전세가 월세로 넘어가고, 중산층이 사라지고, 은행 빚을 얻어 산 부동산의 이자를 갚느라 가계가 빈궁해지고, 높은 실업률과 어디나 불황이라는 흉흉한 소식에 눌린 사람들에게 재물은 점점 더 큰 위력을 과시하며 사람들의 정신과 삶을 억압하고, 성경의 표현처럼 돈을 사랑하는 정신이 사회 안의 일만 악의 뿌리가 되어 무섭게 번져가고 있습니다.

매몬의 금우상이 지배하는 세상에는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음란문화가 성행하고 사람들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부모도 자식도 친구도 양심도 버리고 오래된 신의마저도 저버리며 인간 신체 안의 장기까지 내다 팝니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생존 이상의 의미와 소명이 있습니다. 진실하고 바르고 아름다운 향기를 풍겨야 할 존귀가 깃들어 있는 존재로서 잘 살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인간의 존귀는 거룩함에서 나오며 거룩함이 인간을 영화롭게 합니다.
인간이 본래 거룩한 존재라는 뉴에이지의 정신은 철저히 사단의 거짓말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의 죄에 물든 인간의 마음에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피가 마음에 뿌려져 양심의 악을 깨닫고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아야만 거룩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사를 위해 집을 보러 다니면서 잘 수리되어있고 잘 손질이 되어있는 집을 찾아 그만한 가치를 부여하게 되는 이치를 생각하면서 성령께서 거하시는 집인 나의 영혼을 얼마나 아름답고 존귀하게 가꿔야만 하는가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이 생에서 사람이 추구할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은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죄를 회개하고 거룩함을 입은 사람들을 인정하십니다.
따라서 말 한마디 생각 한 줄기가 성령께서 기뻐하시며, 성령께서 거하시기에 합당한 아름답고 선한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박카스 할머니에 대한 기사를 내 기도 노트에 스크랩하면서 오늘도 매몬의 사각지대에 버려진 많은 노인들과 병약한 사람들, 가난에 허덕이는 아이들이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죄악에 빠져들어가지 않도록 돕기 위해, 이름도 빛도 없이 작은 희생을 바치고 있는 선한 사람들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물질과 권력과 교리의 싸움을 그치고 이 선한 사업에 앞장 설 수 있기를, 그리고 내 인생도 이 일을 위해 드려져 쓰임 받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광란의 밤이 남긴 도시의 쓰레기를 쓸어내시던 이른 새벽 청소부 아저씨들의 건강한 비질처럼, 오늘 드린 나의 간절한 기도가 물질 만능주의와 이기심의 악취가 풍기는 세상의 모든 죄악과 몰염치를 싹싹 쓸어버리며 많은 사람들에게 거룩함에 이르는 회개를 담대히 전파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거룩함은 감미롭고 즐겁고 황홀할 정도로 평화롭고 고요한 본질을 가진 것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것은 영혼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결 밝음 평화 그리고 환희를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영혼을 온갖 종류의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는 들이나 정원처럼 만들었다. 그것에는 유쾌함, 괴롭지 않은 모든 즐거움, 달콤한 고요함에서 얻는 즐거움, 그리고 부드럽게 생기를 더해주는 태양빛이 있다…” -조나단 에즈워드

[서수영 사모 / 밴쿠버크리스찬문인협회 부회장 / penofgod@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