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30일 목요일

필객의 붓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홈통을 타고 흐르는 빗물소리에 새벽을 맞는 동네가 물 위에 둥둥 떠있는 느낌입니다. 빗물에 번지는 포근한 불빛 앞으로 분사되는 투명한 빗방울을 보고 있으니 새벽 하늘이 흘린 눈부신 비늘이 땅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 같습니다. 몇 일째 내리는 비에 부쩍 우거지고 푸르러진 풀과 나무들처럼, 지붕아래 깃든 인간들도 저 맑은 물에 씻겨 탁해진 영혼이 맑아지고 어두워진 총명이 밝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나누며 이해하고 사랑한다면 각자의 담장에 갇혀 마음에 짓눌리고 힘들어하지 않고 살 수 있을텐데, 이웃의 얼굴도 잘 모르고 살 정도로 우리는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아갑니다. 관계에서 단절되면서 사람들이 점점 이상 성격으로 변해가고 있고 우리는 서로를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허리가 휠 정도로 무거운 죄짐을 지고 불안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기도 없이는 정신을 가눌 수 없어 늘 기도를 갈망하면서도 막상 기도하려 앉으면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광야에 표류하여 어디로 방향을 잡고 발을 떼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무엇부터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늘 난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떻게 기도할까를 물어 우리 주님께서 기도의 본을 남겨주셨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내가 처음으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접했던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쯤으로 친구를 따라 갔던 여름 성경학교에서 받은 책받침에 손을 모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 사진 옆에 쓰여진 주기도문을 통해서입니다. 그 이전에 단 한번도 교회에 가본 적 없는 나였지만 그 말들은 세상의 언어와는 다른 신성한 기운과 함부로 할 수 없는 권위가 느껴졌습니다. 미신적인 분위기에서 삼재나 액땜이나 부적이란 말을 들으며 귀신을 무서워하며 살던 나에게는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말이 무척 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악이란 알아갈수록, 살아갈수록 더욱 악하고 잔인하고 몸서리쳐지도록 무서운 것임을 깨닫습니다.
 
죄를 심상히 여기며 웬만한 죄는 죄로 여기지 않고 인간으로서 당연시 되는 세상에서 죄를 싸고 있는 포장이 너무 화려하고 아름다워 아이들은 죄악의 형상을 흠모하면서 자라납니다.
남자 아이들이 귀를 여러개를 뚫고 화장을 하고 눈을 그리기까지 하는 것이 이제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고, 여자들까지 문신을 하고 야한 옷과 음란한 몸놀림을 하는 것이 별 거부감 없이 먹혀들어가고 있고, 욕이 아니면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아이들의 언어가 망가져있습니다. 노골적인 폭력과 음란의 문화에 쩔어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고 반항으로 눈빛이 날카로우면서도 총명의 빛이 어두워져 게슴츠레하게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게임을 끊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지 말고 노래를 듣지 말라고 하면 ‘그럼 나보고 죽으란 말인가’ 하는 얼굴로 뜨악해합니다. 어른들마저 죄도 짓지 않고 심심하고 따분해서 어떻게 사는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사는 재미가 없을 것이라 동정합니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양식은 쾌락이나 재미가 아닌 진리와 거룩함입니다.
 
성경을 19금의 책으로 하는 법률을 제정하기 위해 서명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이 쓴, 성경을 폄하하고 비방하는 글을 읽으면서 정말 마지막 때의 징후 중 가장 뚜렷한 징후를 보는 것 같아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토록 나쁜 쪽으로 부각시키며 일리(?)가 있게 써놓았는지, 아들을 죽이시면서까지 이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합니다. 세상에 악이 충만하다는 성경의 표현에 많은 사람들이 반발합니다. 도대체 세상이 어때서..?  이 편한 세상.. 이 아름다운 세상.. 이라는 긍정의 문구에 익숙하며 아직도 세상은 나쁜 사람들보다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 더 많다고 믿으며 갖고 싶은 것, 가보고 싶은 곳도 많은, 이 세상이나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극단적이고 광신적이며 혐오스러운 표현이라고 눈살을 찌푸립니다. 그래서 교회들은 과격한 표현들을 피하고 슬그머니 긍정의 언어들과 섞어 그 의미들을 누그러뜨렸습니다.
이 세상 신은 사람들을 욕망으로 충동질해서 악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욕망의 덫에 걸려들면 사람들은 그 어떤 지혜의 말이나 눈물의 호소로도 설득할 수 없을 정도로 미련해지고 앞을 분간하지 못합니다. 결국 죄는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시키고 신의 성품을 썩음으로 오염시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음이 악이요 고통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지 않음이 바로 악인 것이고 고통입니다. 모든 악의 근원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있습니다. 이제는 좀 됐나 싶으면 여지 없이 나의 허물과 죄가 나옵니다. 양파껍질 처럼 죄와 허물과 더러움과 부끄러움은 까도까도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악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 내 안에서 끝없이 일어나는 죄악을 멈출 수 없지만,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영이 내 생명의 주체가 되시기에 더이상 죄가 나를 주관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오늘도 예수님의 한없이 온유하고 평온한 음성이 나를 너무나 영광스러운 은혜의 자리로 초청하십니다. 허무로 짙은 그림자 나라에서 시간에 허덕이며 사는 먼지보다 작은 존재이지만, 오늘도 예수님의 영이 나를 악에서 건져주시며 성령님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를 덮으시라는, 과감한 기도를 하늘로 쏘아 올립니다.
 
[서수영 사모 / penofgod@gmail.com]
 
 
 
 
 

건강 칼럼



 
 
 
 
 
 
 

養生 十六宜  (2)

 
5. 齒宜常叩 (치의상고)
이를 강하게 하고 잇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이를 자주 맞부딪힌다. 이를 가볍게 탁탁 부딪치면 이와 잇몸이 튼튼해진다. 위아래의 이를 서로 부딪쳐서 소리가 나도록 하는데, 먼저 어금니를 하고 다음 앞니를 한다. 각각 18번씩 한다. 아침 저녁으로 할 수 있다.

6. 舌宜舔顎 (설의첨악)
혀로 자주 입천장을 핧는다. 혀로 입천장 여기저기를 핧으면 혀 안에서 침이 생겨 입이나 혀가 마르지 않고, 아울러 소화도 잘 된다. 혀끝으로 입천장에 대고 전후좌우로 침이 고일 때가지 핧는다.

7. 津宜數咽 (진의삭인)

침을 자주 삼킨다. 침을 자주 삼키면 오장의 기능을 도와서 건강해진다. 혀끝으로 입천장을 핧은 뒤 입을 부풀려 침을 입안에서 양치질하듯이 머금었다 꿀꺽꿀꺽 소리를 내면서 삼키는데 마음속으로 배꼽 아래 단전으로 내려 보낸다고 생각한다.

8. 濁宜常呵 (탁의상가)

탁한 기운을 자주 내 뱉는다. 기를 원활하게 소통시킴으로 가슴이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은 것을 없애준다. 입을 다물고 코로 깊게 숨을 들이쉬어 가슴과 배가 불룩하게 솟아 숨이 가득 들어차면 꾹 참고 멈추었다가 고개를 들고 입을 벌려 탁한 기를 단숨에 내뱉는다. 이처럼 맑은 기운을 들이마시고 탁한 기운을 내뱉는 것을 5~7번씩 반복한다.

9. 大小便宜緊口勿言 (대소변의긴구물언)

대소변을 볼 때 입을 꼭 다문다. 아래위가 마창나게 뚫린 상태로 두면 기가 빠져나가 허한 상태가 되기 쉽다.

10. 腹宜常摩 (복의상마)

배를 자주 쓰다듬는다. 소화기능을 돕고 배를 따뜻하게 하며, 기가 제대로 돌고 쌓인 것을 풀어줄 수 있다. 두 손을 비벼 뜨거워지면 손을 포개서 살에 직접 닿거나 속옷 위에 올려놓고 손바닥의 한가운데를 배꼽에 댄 다음 시계방향으로 돌리면서 문지른다. 먼저 작은 원을 돌리다 점점 크게 돌린다.

11. 谷道宜常提 (곡도의상제)

항문을 자주 오므려 올린다. 기운을 끌어올리고 치질과 요실금을 예방할 수 있으며 젊음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몸을 똑바로 세워 앉은 다음 정신을 몰두하고 숨을 돌이쉬면서 의도적으로 항문과 회음 부위를 오므리면서 올렸다 잠시 멈추고 숨을 내쉬면서 힘을 빼는데 수시로 하면 좋다.

12. 足心宜常擦 (족심의상찰)

발바닥을 자주 비빈다. 발바닥의 위쪽 1/3오목한 부분 한가운데는 용천혈이 있는 곳인데 항상 문지르면 신(腎)장을 튼튼하게 하고, 허리가 강해지며, 스트레스로 화(火)를 끌어내리고 정신을 맑게 한다. 저녁에 발을 씻은 후 엄지손가락으로 양쪽 발바닥을 천천히 문지르는데 뜨거워질 때까지 문지르고 50번 이상 문지른다.

13. 衣膚宜常乾浴 (의부의상건욕)

살갗을 자주 문지른다. 살갗을 맨손이나 부드러운 마른 수건으로 문지르면 기혈순환을 도와주고 살결이 윤기 있어지고 탄력이 좋아진다. 두 손바닥으로 온 몸의 살결을 닦듯이 문지른다. 외기로부터 외사를 방어하는 위기가 강하게 하면 감기와 피부병을 방지 할 수 있다.

14. 肢節宜常搖 (지절의상요)

등을 대고 누워서 팔다리를 들고 자주 흔들어 준다. 사지는 제양지본이고 이 운동을 자주함으로 손발의 붓기를 내리게 할 수 있다.

15. 背宜常暖 (배의상난)

등을 따뜻하게 한다. 오장육부의 배수혈을 포함하는 12경락 중 방광경 1,2라인이 있기 때문에 따뜻하게 함으로 기혈의 순환을 돕고 감기를 예방하기 위함이다.

16. 胸宜常護 (흉의상호)

가슴을 드러내지 않고 보호한다. 주요 장기인 폐장, 심장, 간장을 보호하고 외사로 한기로부터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클로버데일한인교회 담임 / 엘림한방클리닉 원장 R.Ac, TCM.P / 604-441-6934]
 
 
 
 
 

4인4색 밴쿠버목양일기



 
 
 
 
 
 
 
 

사회적 복음

얼마 전 한 가지 질문을 받았는데, 그 내용이 “한국교회에 가장 부족한 점이 무엇입니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이와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흔히들 언급하는 대형 교회들의 재정 투명성의 문제점을 지적할까요? 아니면 목회자의 세습 문제를 이야기 할까요? 요즘 밴쿠버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몇 몇 선교단체들의 자기만족의 함정에 빠져버린 잘못된 선교전략을 들 수도 있고, 지나치게 은사의 체험에만 집중하는 흐름을 우려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한국교회에 가장 부족한 부분이 “사회적 복음(Social Gospel)”이라고 꼽고 싶습니다.
 
어떤 분은 복음의 선포와 선교를 이야기하고 하나님 나라를 말하며 왜 ‘사회적 복음’이 한국교회에 부족한 점이냐고 반론할 수 도 있겠습니다. 저 자신도 목사이지만 강단에서 선포되는 목회자의 메시지를 분류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비중으로 Social Gospel이 선포되고 있습니까? 혹시 선포되는 복음이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개인 영혼의 구원에서 그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안겨 주신 그 거룩한 복음의 선물을 반토막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성도 분들을 만나 대화하다 보면 생각 외로 많은 분들이 ‘사회적 복음’에 대해 낯설어 한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됩니다. 심지어 어떤 분께는 사회적 복음을 두고 ‘좌익이냐?’‘빨갱이 아니냐?’ 라는 말까지 들은 적도 있습니다. ‘사회적 복음’을 따로 특별하게 포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새로운 것으로 생각하고 경계심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뜻하는 것이 사회적 복음이요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가 바로 사회적 복음입니다. 의미를 조금 좁혀보자면, ‘정의(Justice)’가 되겠고 공의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중요성은 구약의 선지서를 통해서 얼마나 강조되었는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모스서 5장 21-23절에 이런 말씀이 선포됩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절기와 성회도 넓게 보아 예배를 뜻함이고, 번제나 소제도 예배를 말함입니다. 어떤 분은 화목제를 감사의 예물이니, 감사헌금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감사예배’라고 하고 싶습니다. 노랫소리와 비파소리는 당연히 찬양이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찬양을 듣지 아니하시겠다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어지는 24절의 당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우리가 사회적 정의를 지키지 않고 공의를 어기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찬양도 듣지 않고,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 뿐입니까? 5절에서 언급되는 벧엘과 길갈은 이스라엘의 예배 중심지였습니다. 주로 이스라엘의 부유한 사람들, 권력을 가진 사람들, 명예로운 자들이 나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역시 곧이어 이유가 밝혀집니다.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너희가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었은즉 ……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그들에게 정의가 없고 공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사회적 복음’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나 혼자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지 않으시겠다고 하실 때는, 우리가 기도를 잘 못해서, 찬양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정의와 공의를 지키지 않아서 입니다.
사회적 복음에 부딪히는 간단한 예를 한 번 들어보자면, 우리 삶에서 흔히 부딪히는 문제 중 ‘주일성수’의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 밴쿠버에서 주일성수는 엄격한 주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저도 주일성수 못하는 성도를 정죄해 본적은 없습니다만, 그것은 신앙의 훈련을 통해 이루어지는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주일성수가 중요하지 않아서는 아닙니다. 그런데 소수의 몇몇 분들이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는 열어서 직원들을 시켜서 운영하고 자신은 예배에 참석하여 주일성수 한다고 하는 것을 전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주일성수 하는 것일까요? 개인의 측면에서 보면 예배드리지 않는 것보다는 예배드리는 것이 낫다고 말 할 수 있겠지만, 사회적 복음의 측면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자신이 주일을 온전히 지킨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 될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예배 드린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돈을 주며 예배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자신의 죄를 알고 회개하는 것이지, 죄를 줄이고 위선으로 합리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를 의롭다 하신 것도 같은 원리 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실 때는 자신 만이 아니라, 가족과 일하는 사람은 물론이요 머무는 손님까지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회적 복음입니다. 나만 혼자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고 구원 받았으니 다른 이도 믿고 구원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회적 복음입니다. 내가 구원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지극히 사랑하신 이유인데, 그 동일한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도 주어진 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사회적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저 사람을 내가 가진 것이 많다고, 힘이 조금 더 있다고 핍박하고 멸시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회적 복음입니다. 나만 홀로 구원받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구원받고 더불어 잘 살아 가는 것, 이것이 사회적 복음입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사회적 복음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충성된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용균 목사 / 밴쿠버한마음교회 / 778-554-9003]
 
 
 
 
 

아브라함 이야기



문제, 해결 그리고 신앙고백/ 창 24:2-9 (하)

맹세의 내용
아브라함은 자신의 고향과 족속에게로 가서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 것을 맹세하라고 하였습니다 (창 24:4). 아브라함의 원래 고향은 갈대아 우르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란을 자신의 고향으로 여겼기 때문에, 훗날 아브라함의 종은 갈대아 우르가 아닌 하란으로 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시키는 대로 맹세를 한 후, 아브라함의 종은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일에 대비하여 질문을 합니다. 즉, 만약에 자신이 택한 신부감이 가나안으로 오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삭을 데리고 하란으로 가야 하는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말합니다.
특히 우리는 아브라함과 종과의 대화를 통해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믿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천지의 주재이신 창조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신앙
3절을 보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여기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땅과 하늘을 지으신 창조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그는 종으로 하여금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게 맹세하게 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종에게만 그런 맹세를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미 오래 전에 소돔 왕에게 똑같은 맹세한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창14:22). 이것은 아브라함의 신앙이 가식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신앙인의 능력은 돈과 명예와 권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말씀에 대한 순종과 거룩함에서 비롯됩니다.
2. 불러주시고 소명을 주신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신앙
7절에 상반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이렇게 종에게 고백합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이것은 욕심과 고집대로 살아가던 나를 불러주셨을 뿐 아니라 살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시고 언약을 주신 하나님이 바로 천지와 우주만물의 주인되신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진화론은 우연을 믿지만 우리 신앙인들은 필연을 믿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고백처럼, 오늘 우리가 신앙인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인으로 견고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3. 약속하신 대로 성취하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신앙
7절 하반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셨다”는 것은 마지막 시험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과 연결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창 22:16). 여기서 맹세란 반드시 지키신다는 의미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자신을 불러주시고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실 것이기 때문에,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다시 한 번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7절).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사자가 너를 인도하지 않아, 신부감으로 정한 여자가 가나안으로 오려고 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을 확신했기 때문에 이삭을 데리고 가지 말라고 엄히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지의 주재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나를 불러주셨고, 말씀하셨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부모 공경을 통한 장수의 약속과, 주일성수를 통한 평안의 약속과, 기도를 통한 응답의 약속과, 십일조를 통한 축복의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믿고 고백하고 순종함으로 범사의 복을 누렸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 고백, 그리고 순종을 통해서 범사가 잘 되는 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기수 목사 / 캐나다중앙교회 / 778-237-8084]
 
 
 
 
 

2013년 5월 25일 토요일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41 >



 
 
 

666 이야기(6)  로마교황의 축복과 저주 ④

 
 



61. 1982년 9월, 모나코의『그레이스』왕비는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이 사고가 있기 약 2년 전 왕과 왕비는 로마에서 홍보영화 촬영을 하는 동안 로마교황을 접견하였다.
62. 1984년 5월, 로마교황『요한 바오로』2세는『파푸아 뉴기니아』를 방문,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같은 해 9월, 『뉴 브리턴』섬의『물루웨이』화산이 분출하여 섬주민들은 대피하였고 1985년에는 집단강간 살인, 강도 등의 폭력사건이 온 섬에 만연하였다. 1986년『소매어』는『윙티』에 의해 축출되었다. 
63. 1984년 5월, 로마교황은『과달카날』과『호니아라』를 방문, 『솔로몬』군도(群島)를 축복하였고, 아울러 인근『피지』와『바노트』섬에서 온 방문자들도 축복하였다. 1985년 1월『에릭』이라 불려진 태풍과 3일 후『니켈』이라 명명된 태풍이 섬들을 강타하였다. 특히『피지』와『바노트』에 있는 가옥과 농장은 큰 피해를 입었다. 1986년 3월, 태풍『나무』는『솔로몬』군도를 황폐케 만들었고, 섬주민의 절반이 집을 잃었고, 계속하여『시카이나』,『말라이타』,『과달카날』,『산 크리스토벨』섬들을 강타하였다.
64. 1985년 8월 13일 로마교황은 아프리카『카메룬』국의『보멘다』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야외미사를 가졌다. 1년 후 화산호(湖)인『니요스』호수에서 독가스가 분출되어『보멘다』시의 외곽지대의 촌락들에서만 2천 여 명이 사망하였고, 짐승^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65. 1986년 11월 22일, 로마교황은『랭』수상이 이끄는 뉴질랜드를 방문하여 환대를 받았다. 1989년 8월, 『랭』수상은 더 이상 정치적 압력을 견디다 못해 사임하였다. 비록 그가 속한 당이 1987년 8월 선거에서 이겼지만 그에 대한 개인적인 추문은 그를 계속 괴롭혔다. 
66. 1986년 11월 25일, 뉴질랜드 야당 당수였던『하워드』는 의회에서 로마교황을 환영하였다. 그의 환영연설문 중 일부를 발취해보자: “(로마)교황께서는 이 시대의 가장 존경받는 기독교인으로서 이 곳을 방문하셨습니다…우리는 당신을 교회의 가장 추앙받는 위대한 지도자로서 환영합니다…기독교신앙의 최고 멤버로서 말입니다…!” 『하워드』는 1988년 총선에서 패배 당한 후 자유당 당수직에서 밀려났다.
67. 1986년 11월 26일, 『제프 커넽』은 자신이 비록 로마카톨릭교도가 아닐지라도『플레밍톤』경마장에서 로마교황 집전하는 미사에 참가할 것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로마교황을 만났다. 1989년『커넽』은 빅토리아에 있었던 선거에서 패배, 6개월 후 자유당 당수직에서 물러났다.
68. 1986년 11월 26일, 『뉴 사우스 웨일즈』의 수상『언스워스』는 시드니에서 로마교황을 영접하였다. 호주노동당은 1988년 선거에서 패배하고『언스워스』는 실각하였다.
69. 1986년 12월 1일, 호주의 재벌『알란 본드』는『퍼트』에서 로마교황을 영접하여 무릎을 꿇고 교황의 반지에 입맞춘 후 개별적으로 교황과 면담을 가졌다. 그 후 그의 사업은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호주의 방송심의위는『본드』가 방송면허를 소유할 자격이 없다고 판결하였고, 그의 재정상태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70. 1987년 로마교황이 미국을 떠난 지 한 달이 채 못되어『월』가(街, Wall Street)의 엄청난 주가폭락에 온 세계는 “검은 월요일”(Black Monday)을 맞았고, 미국은 로마교황『요한 바오로』2세가 준 축복의 사태에 깔려 휘청거렸다. 

아마도 1,700년 동안 로마교황(청)의 축복을 받고 망한 사람들을 계수한다면 시간이 부족할 것이다. 두 번이나 로마교황의 축복을 받은 한국, 그가 떠난 후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그를 만난 교계 지도자들에게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슈퍼스타”, “날으는 교황”의 별명이 붙은 이 교황은 지구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축복하고 있다(역대 로마교황들은 거의 로마를 떠나지 않고 죽었다). 그의 발이 닿는 곳은 곧 재난을 동반하였으며 이것은 온 세상에 임할 재앙을 우리들에게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교황의 축복이 재앙을 동반한다면 그의 저주는 응당 축복을 가져올 것이다.
▣ 로마교황『비오』9세는 이탈리아의 해방자였던『빅토르 엠마누엘』왕을 저주하였다. 또 이탈리아를 자유국으로 만들고 로마를 그 수도로 선포한 이탈리아 정부를 저주하였다. 로마교황의 저주로 이탈리아는 세계열강의 하나가 되었지만, 이디오피아를 정복하러 떠나던 이탈리아 군을 로마교황이 축복한 후부터 이탈리아 제국은 다시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가리발디』는 그의 모든 애국적인 노력 때문에 로마교황으로부터 파면되었다. 특히『시실리』왕국을 전복시켰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가리발디』는 이탈리아의 영웅이 되었고 그를 기념하는 기념물들이 여기저기에 세워졌다.

▣『비스마르크』와 프러시아왕이『제수이트』(일명 예수회)사제들을 추방했을 때 로마교황은 프러시아를 저주하였다. 로마교황의 저주는 축복이 되어 프러시아는 세계열강의 하나가 되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격파하였고, 어느 날 그 지도자가 로마교황과의 친교관계를 맺는 불운이 오기 전까지 수년간 서유럽 최강의 제국으로 군림하였다.

▣『헨리』8세와『엘리자베스』여왕에게 내린 로마교황의 저주는 영국에 큰 축복이 되었다. 반대로 아일랜드에 내려진 로마교황의 축복은 아일랜드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마틴 루터』가 로마교황『레오』10세로부터 받은 저주로 인해 온 세계의 기독교회가 누려온 축복을 어찌 다 헤아릴 수가 있을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엄히 말씀하시고 계신다: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말라기 2:2)
하나님께서는 대원군을 일으키시고 프랑스 군함에 실려오는 로마카톨릭교의 세력을 막게 된 바, 한국이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로마화(化)되는 것을 막아주셨다.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로마종교가 들어간 나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라. 오늘 날 로마종교와의 일치운동에 빠져있는 한국교회의 낭만적인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이 받을 저주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이들이 짓는 죄악은 무겁고 분명한 진리인 바, 이 진리가 보여주는 것은 너무나 침통하고 슬픈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羊)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게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7:15-20)
 
      성부 하나님께 영광 성자 예수께 영광
      성령님께 크신 영광 돌려보낼지어다
      찬양하리 찬양하리 죽임 당한 어린양
      주께 영광 돌리어라 나의 죄를 씻어 주셨네
      <찬198 / 정결하게 하는 샘이⑤>
 
  구영재 선교사 [KOO /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
 
◇ 알려드립니다 ◇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는 필자의 사정으로 당분간 쉽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7월에 다시 연재될 예정입니다.【편집인】